<24> 승천하지 못한 용의 전설 깃든 곳 소두머니(충북 진천군 문백면 은탄리 충북학생종합수련원~청주시 오창읍 여천리 보강천 합수부)

▲ 충북 진천군 문백면 은탄리와 초평면 소두머니를 오고갔던 배. 2000년대 초반까지 뱃사공 할아버지가 살아계셔 운행됐지만 현재는 진천 출신의 노마디즘 미술가 김주영씨의 설치작품으로 재탄생돼 작업실에 보존돼 있다. 사진은 2008년 김주영씨가 촬영한 것이다.

조선 후기 학자 정해필

한시로 소두머니 풍경 노래

 

깊고 맑았던 물 오염되고

왕래하던 배는 미술작품으로

 

지명 관련 전설·풍경

민간신앙·용신놀이로 이어져

미호천 물길을 걷다보면 자동차가 없는 시절을 상상해보곤 한다. 미호천 수량이 풍부했던 옛 시절 물길을 중심으로 좌안과 우안을 오고가며 농사일을 해야 할 때 농부들은 어떻게 이동했을까. 아마도 돌보를 만들거나 나무로 엮어 다리를 만들어 사용했을 터다. 그러나 강폭이 유난히 넓어 돌보나 나무다리를 놓을 수 없을 때는 배가 필요하다. 진천군 문백면 은탄리(銀灘里)와 초평면 연담리를 가로지르는 미호천 구간이 바로 그런 곳이다.

은탄리 충북학생종합수련원에서 오창읍 여천리 보강천 합수부에 이르는 약 8km 구간을 이틀에 걸쳐 답사했다. 이 구간은 제방 둑이 없어 미호천 둔치의 수풀을 헤치고 걷거나 산길을 에돌아 걸어야 하는 난코스에 해당한다.

학생수련원에서 출발해 우안을 따라 걷다보면 미호천 물줄기가 은탄리 갈궁저리(갈탄마을) 내륙으로 깊이 치고 들어온다. 힘겹게 산을 굽이돌아야 하는 S자형의 반대 모양새다. 그러다 갈궁저리에서 왼쪽으로 흐르는 물줄기는 완전한 디귿자형(소머리를 닮았다)을 이루고 있고 이곳에서 직선으로 은탄교로 흘러내려간다. 산 하나를 감싸고 돌 만큼 디귿자형을 이루는 물길은 좌안인 초평면 연담리와 소두머니(牛潭) 마을을 푸근하게 감싸고 있다. 미호천 우안은 문백면이고 좌안은 초평면으로 나뉘는데 문백면 은탄리와 마주 보이는 초평면 소두머니 사이에는  갈궁저리 마을에서 내려온 가파른 물길의 영향으로 모래백사장이 마치 바다가 연상될 만큼 넓다.

현재의 은탄교가 건설되기 전(교량에 새겨진 연도는 1999년 5월 완공으로 돼 있다) 다른 다리가 없었다면 배가 아니면 건널 수 없는 물길이다. 실제 은탄리에는 나루터가 있었고 배를 건너 주는 뱃사공이 2000년대 초반까지 생존해 있었다. 안타까운 것은 뱃사공이 돌아가신 후 배는 은탄리 미호천 변에 주인을 잃은 채 놓여 있었고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풀씨가 날아들고 흙이 쌓여 생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던 배는 마침 2008년 충북지역의 문화예술인 몇몇이 ‘미호천 물길따라, 풀길따라’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중에 진천군 출신의 김주영 작가(노마디즘 미술가)가 그 배를 이용해 설치작품을 만들기로 했다. 은탄리에서 옮겨진 배는 미술작품으로 다시 태어나 당시 강내면 궁평리 미호천에서 설치작품으로 선보였고 이후 청주시 스페이스 몸 미술관에서 전시되기도 했다. 현재는 안성에 있는 김 씨의 작업실에 있다. 배의 역사를 놓고 보자면 특별하고 기구한 것이다.

배가 은탄리에 있을 때는 오다가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은탄리의 멋진 미호천 풍경에 반하고 그 곁에 놓여 있는 배의 풍경이 정겨워 길을 가다 멈춰 사진을 찍곤 했다는 것이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다. 사람의 손길을 떠난 물건은 세월이 흐르면 자연히 파괴되는 것과 같이 은탄리의 멋진 풍경을 연출해 주었던 배를 현재까지 그대로 그곳에 두었다면 비바람에 소모돼 자취조차 사라져버렸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다시 그 배가 놓여 있어야 할 가장 적절한 곳은 은탄리 미호천변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은탄리 미호천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한쪽의 배가 있어야 어울릴 만한 풍경이다.

은탄리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 은성(銀城)과 갈탄(葛灘)에서 한 자씩 따서 생긴 지명이다. 주변에 양천산(350m)과 불당산(288m)이 있어 미호천과 접하는 구간이 절벽을 이루어 미호천에 접근하기 어려운 이유다. 은탄리 자연마을로는 아직까지 은성과 갈탄(갈궁저리), 도룡골, 삼신당, 은재, 주라골 등이 있으며 주요 농산물로 평야지대에서는 쌀을, 구릉지에서는 완사면을 이용한 고추·콩·과수 및 가축 사육 등을 하고 있다.

갈궁저리는 목마른 말이 여울에서 물을 마시는 형국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갈궁저리 맞은 편 미호천 좌안에 소두머니(牛潭)라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는 기암절벽이 있는데 절벽아래 명주실 타래가 몇 타래 풀려 들어갈 만큼 깊은 우물이 있다. 이 물에 서린 이야기는 옛날에 용이 되려는 한 뱀이 들에서 10년, 산에서 10년, 물에서 10년을 살아야 한다고 했다. 이 뱀이 어렵게 30년을 살고 용이 되기 위해 안개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데 이를 본 임신한 아낙네가 소리치는 바람에 부정이 들어 용이 되지 못하고 이무기가 되었다. 그 후 이 깊은 우물을 ‘이심이 소(沼)’라고 했으며 이때부터 해질 무렵이면 지나는 행인마다 간데없이 갓만 물 위에 떠있고 더구나 농민이 매어 놓은 소도 늘 없어지곤 했다. 이를 이무기의 소행이라 생각한 한 농민이 칡덩굴로 소머리를 잡아매어 물가에 담아두었더니, 그 소머리는 그대로 칡덩굴에 달려 있었다 해 이 여울을 우두머리라고 불렀다. 후에 소두머니로 이름이 바뀌었고, 지금도 그 못을 이심이 소라 하며 남아 있다.

‘깊은 물 맑고 푸른데 산을 뚫은 듯/ 조그마한 배는 역류에서 가볍게 출렁이도다/ 도인을 따르는 곳에 진정한 낙이 있구나/ 반나절이나 고기 떼 새 떼 오락가락하는 한가로운 곳 왕래하도다’

조선 후기 학자인 정해필(鄭海弼:1831~1887)이 은탄리와 강 건너 연담리 소두머니 앞에 펼쳐진 풍경을 칠언절구의 한시로 읊은 것이다. 그만큼 물이 맑고 깊었으며 바다를 연상할 만큼 넓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것은 현재 이곳은 물이 오염돼 칠언절구의 내용만큼 물이 깊고 맑지는 못하다. 오래전 갈궁저리와 소두머니를 왕래하던 배도 사라진지 오래다.

소두머니에 내려온 전설과 소두머니가 갖고 있는 풍경은 자연스럽게 용신제(龍神祭)라는 민간신앙과 마을주민들에 의한 용신놀이로 이어졌다. 용신제는 무당들이 소두머니에서 용신굿을 하는데, 이때 마을 사람들이 농악을 앞세우고 농기구로 소박하게 거북을 만들어 마을의 안녕과 소원을 빌었다고 전해지는 데서 전래된 놀이다. 소두머니 용신제는 1920년대까지 전승돼 오다가 그 명맥이 사라졌는데 1995년 진천군에서 다시 발굴해 매년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소두머니 용신제는 몇 년 전부터 농다리 축제로 편입돼 문백면 구곡리 구곡마을 옆을 흐르는 세금천변에서 재현하고 있다. 용신제 내용은 용신맞이굿, 용신 마중, 용신 모시기, 용신 농다리 건너기, 용신 보내기 굿 등의 순으로 진행된다.

소두머니 용신놀이에 대한 유래는 소두머니 깊은 냇물에 청룡과 백룡이 살고 있었다고 전해 내려온다. 이 소두머니 동쪽에는 청룡을 모신 청룡신당을, 서쪽에는 백룡을 모신 백룡신당을 세우고 매년 정월 보름에는 동제를 지내고 가뭄에는 기우제를 지냈다. 기우제를 지낼 때는 주민들이 냇물에서 도리깨질을 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틀에 걸친 이 구간의 답사는 미호천의 여덟 번째 지천인 청주시 오창읍 여천리 여암교 보강천과 만나는 지점에 이르렀다. 이 보강천 합수부를 기점으로 미호천은 그 이전 상류는 지방하천, 이후 금강 합수부까지는 국가하천으로 분류된다. 11월 중순 보강천 합수부로 가는 길에  날이 좋아 추수가 끝난 들녘의 벼가 다시 자라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김정애기자(취재지원 미호천 지킴이 전숙자·임한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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