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주 충북수필문학회장

고산사 정대스님과 작별하고 씁쓸한 마음으로 고려산성으로 향했다. 내비게이션에 ‘아야목 마을 회관’을 입력하고 1번 국도를 북으로 달렸다. 해발 305m 고려산은 해묵은 참나무가 우거져 있었다. 마루에서 북으로 흘러내린 산줄기가 마을을 감싸 안았다. 마을은 볕이 따뜻하다. 논밭에 풀이 파랗고 끝에는 늪이 있었다. 샘이 있어 산성에 생명수가 되었겠다. 산길은 제법 가파르다.

숨이 턱에 닿을 때쯤 마루에 도착했다. 성벽은 보이지 않고 넉넉한 평지만 보이는데 뚝눈에도 성의 흔적이 뚜렷했다. 외부는 돌로 쌓고 내부는 흙으로 채운 토석혼축형 성벽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성안의 흙이 흘러내려 성벽을 덮고, 잡초와 잡목이 우거지고 낙엽에 뒤덮였다. 흙에 덮인 성벽은 윤곽으로도 높이가 3~5m 정도는 돼 보였다. 가파른 산인데다가 성벽이 높아서 공략하기는 결코 만만치 않았을 것 같았다.

성을 한 바퀴 돌았다. 동쪽 끝에서 무너져 널브러진 성석을 발견했다. 성 돌을 다듬은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자연석을 교묘하게 맞추어 쌓았을 것이다. 성안 평평한 대지 위에는 참나무만 드문드문 서 있고 성벽 쪽으로는 낮아서 평평하고 가운데는 불룩했다. 가운데 불룩한 데서 둘러보니 둘레 250m쯤 되어 보이는 성 안이 한눈에 다 들어온다.

한가운데 나지막한 돌탑이 서 있다. 성 돌을 모아 대충 쌓았는데도 넘어지지 않았다. 돌탑을 들여다보다가 와편을 발견했다. 기와는 잿빛이었으나 붉은 물이 배어나온 듯 붉은 보랏빛을 띠기도 했다. 돌 틈에 토기편도 보였다. 토기 조각은 두꺼운 것도 있고 얇은 것도 있다. 두꺼운 것은 큰 그릇이고 얇은 것은 작은 그릇일 것이다. 몇 개의 토기 조각만 보아도 그릇의 종류가 꽤 다양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와편은 건물이 있던 증거이고, 토기편이 다양한 것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지속적으로 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 안 바닥은 돌이 많지 않고 흙이 부드럽다. 많은 사람들이 머문 흔적일 수도 있다. 터의 모양을 보면 마을 쪽이 널찍널찍한 것으로 봐서 그 자리에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연기 지역은 신라, 고구려, 백제가 접경을 이룬 곳이다. 이 부근 연기 일대의 운주산성(고산산성)을 비롯해 이성, 작성, 금이성 등 15개 이상의 산성이 있다. 고려산성은 아주 작은 산성이지만 주변이 다 내려다보이는 요새에 자리 잡아 시대마다 지역의 보루가 됐을 것이다. 처음에는 백제의 최전방 보루였을 것이다. 시대를 넘어 고려시대에는 천안 지방의 외곽 역할을 했고, 때로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니 성돌 하나하나마다 시대의 흥망에 따라 역사의 성쇠를 모두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산성이 운주산성과 함께 백제 부흥운동의 근거지가 되었을 것이라는 짐작도 그런대로 일리가 있다. 아마도 주요 근거지는 주류성으로 짐작되는 금이성이고, 마지막 근거지가 운주산성이었다면 이곳 고려산성은 그 중간의 초소나 보루가 됐을 것이다. 산성을 내려오면서 금이성에서 운주산성으로 이어지는 백제 부흥군의 파발이 이 산줄기를 타고 여기서도 잠시 숨을 돌렸을 것을 생각하니 등골이 서늘하다. 마을 앞을 지나며 예나 지금이나 아무런 상관도 없이 역사의 질곡에 얽매어야 하는 백성들의 고달픈 삶을 헤아려 본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