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천년의 전설 농다리, 자연과 상생하는 농부(農夫)를 위한 다리
(진천군 초평면 오갑리~초평천 합수부)

▲ 천년의 세월을 간직한 충북유형문화재 제28호 진천 농다리. 농부들이 농사지을 때 굴티 마을과 용고개 마을을 오가는 다리였다. 자연 물길과 사람이 상생하는 자연스러운 형태의 다리다.

먹뱅이산 정상에 오르면

백곡천 합수부 절경 한눈에

 

고려때 수월교 형태로 축조

과학 원리·철학까지 담겨

 

전망대·인공폭포 등

인공 구조물, 옥의 티

 

10월 초순, 빛의 변화에 탐닉했던 서양화가 클로드 모네가 그림을 그려 놓은 것 같은 풍경이 이어졌다. 들녘의 색과 산, 그리고 미호천 강물의 색채가 어우러져 한 폭의 유화 그림을 보는 듯하다. 미호천 전 구간 중 가장 아름다운 구간이라고 할 수 있는 충북 진천군 초평면 오갑리 돌여울 마을에서 천년의 세월을 간직한 진천 농다리, 초평천 합수부 구간이다.

전날 답사가 백곡천 합수부에서 끝났지만 오늘의 답사는 합수부에서 시작하는 우안을 따르지 않고 다시 오갑리 돌여울 마을로 되돌아와 농다리로 향해 걷기 시작했다. 이 구간을 선택한 것은 우안을 따라 가는 길이 중간에 미호천과 접근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먹뱅이산(200m) 임도를 경유해 미호천을 따라 갈 경우 미호천 전 구간 중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만날 수 있다는 미호천 지킴이 임한빈(54)씨의 제언에 따른 것이다.

미호천 좌안 돌여울 마을에서 비포장 도로를 따라 먹뱅이산으로 오르는 길은 옛사람들이 임도로 사용하던 길이다. 이 길을 따라 갈 경우 왼쪽으로는 초평저수지가 펼쳐져 있고 오른쪽으로는 미호천이 접해 이어져 있다. 산을 오르는 동안 미호천의 모습을 고스란히 볼 수 있는데 미호천 우안의 경우 하천정비가 돼 있지만 먹뱅이산 쪽 좌안은 산의 절벽과 맞닿아 있어 자연스러운 하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다행이었다.

구불구불 자연스럽게 형성된 임도를 따라 정상에 올랐을 때 백곡천과 미호천이 만나는 드넓은 합수부의 모습을 한눈에 조망 할 수 있다. 마침 우리가 답사하는 날 먹뱅이산 정상에서 미호천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진천군이 전망대를 설치하는 공사를 하고 있었다. 굳이 전망대가 없어도 산을 넘어가면서 자연스럽게 미호천의 풍경을 볼 수 있다. 진천군이 예산을 들여 등산객들의 안전을 위해 전망대를 설치하지만 산과 자연경관을 해치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전망대를 설치하느라 나무를 베고 길을 내고 하는 것이 결국 또 하나의 자연파괴이기 때문이다. 나무숲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풍광도 나름 자연을 바라보는 매력이라는 사실을 진천군이 인지해주길 바랄 뿐이다.

이곳 전망대가 있는 산에서는 합수부뿐 아니라 진천군 문백면 장월리, 구곡리 일대의 들녘이 한눈에 다 내려다보인다. 넓은 합수부에 형성된 하중도에서는 고라니가 먹이를 먹고 있는 장면도 카메라에 잡혔다. 합수부는 하천이 갖고 있는 여러 특성, 예를 들면 하중도, 여울, 소(沼) 등이 두루 갖춰져 있어 미호천이라는 하천의 웅장한 위용을 실감할 수 있다.

먹뱅이산 정상에서 임도를 따라 하산하면 드디어 천년의 세월을 간직한 농다리를 만나게 된다. 진천군 문백면 구곡리 굴티마을 앞에 있는 충북유형문화재 제28호 농다리(1976년 12월 20일 지정)는 길이 93.6m, 너비 3.6m, 두께 1.2m, 교각 사이 폭이 80㎝인 돌다리다. 이 돌다리는 고려 고종 때 권신 임연(林衍)이 놓았다는 전설과 그의 누이가 놓았다는 두 가지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임연이 매일 아침 세금천에서 세수를 하였는데, 어느 몹시 추운 겨울날 한 젊은 부인이 세금천을 건너려는 것을 보고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랬더니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친정에 가는 길이라고 했다. 임연은 부인의 지극한 효성과 그 정경이 딱해 용마를 타고 달려가 하루아침에 다리를 놓았다 한다. 그때 용마는 너무 힘에 겨워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었고, 용마에 실었던 돌은 용바위가 되었다고 전한다.

다른 한 편의 내용은 굴티 임 씨에게 남매가 있었다. 둘 다 훌륭한 장사로, 어느 날 죽고 사는 내기를 했다. 아들(임연 장군)은 굽 높은 나무깨를 신고 목매기 송아지를 끌고 서울에 갔다 오기로 하고, 딸은 농다리를 놓기로 했다. 딸이 치마로 돌을 날라 거의 다리를 다 놓았는데 아들은 올 기미도 없었다. 어머니는 아들을 살릴 묘책으로 딸에게 먹을 것을 해다 주며 일을 늦추게 했다. 결국 아들이 먼저 돌아와 내기에 이겼고, 화가 난 딸이 치마에 있던 돌을 내던졌다. 딸은 약속대로 죽었고, 딸이 내던진 돌이 아직까지도 그 자리에 박혀 있다. 딸이 마지막 한 칸을 놓지 못해 나머지 한 칸을 다른 사람이 마저 놓았는데, 딸이 놓은 다리는 지금도 그대로 있지만 다른 사람이 놓은 다리는 장마만 지면 떠내려간다고 한다. 또 나라에 큰 변고가 생기면 이 농다리가 며칠씩 운다는 슬픈 전설이다.

이같은 전설은 900년 전 고려 초기 굴티 임씨 임연 장군이 붉은 돌로 음양을 배치해 28간(間)을 놓은 진천농교에 대해 임씨 집안에 내려오는 이야기다. 이 전설은 지역전설로 처음 임연이 효부를 돕기 위해 놓았다는 전설이 이후 장사인 오빠와 누이가 목숨을 걸고 힘내기 시합을 할 때, 어머니가 아들 편을 들어 딸이 죽는다는 ‘오누이 힘내기 설화’와 결합해 흥미를 더해 주고 있다. 이야기의 요점은 효를 백행의 근본으로 숭상했던 전통 의식과, 그런 갸륵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하늘도 감동해 도움을 준다는 당대의 문화의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다리를 구성한 돌들은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해 모양이 제각각이다. 모두 사력암질의 붉은색 돌을 사용했는데 깎거나 다듬지 않았다. 얼기설기 얹어 놓은 것으로 보이지만 강한 물살에도 떠내려가지 않는 과학적 원리와 함께 철학적 뜻까지 담고 있다. ‘조선환여승람(朝鮮環與勝覽)’의 기록에 따르면 자석배음양, 즉 음양의 기운을 고루 갖춘 돌을 이용해 고려 때 축조했다고 한다. 28개의 교각은 하늘의 기본 별자리인 28숙(宿)을 응용했고 장마 때면 물을 거스르지 않고 다리 위로 넘쳐흐르게 만든 수월교(水越橋)형태로 만들어 오랜 세월을 이겨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위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지네가 기어가는 듯 구불거리는 모양으로 생긴 다리는 빠른 물살에 견디기 위한 구조다.

또한 교각 역할을 하는 기둥들은 타원형으로 만들어져 물살을 피하고 소용돌이가 생기는 것을 막는다. 어눌하게 생긴 돌다리가 천년을 이어온 비밀이 바로 여기에 있다. 1976년 충청북도 지방유형문화재로 지정될 당시만 해도 24간이 남아있었지만 고증을 통해 최근 28간으로 복원했다.

진천군은 주요 문화유산인 농다리의 존재를 알리고 보존하기 위해 전시관을 만들었으며 해마다 이곳에서 농다리 축제를 열고 있다. 살아서는 농사를 짓기 위해 건너고 죽어서는 꽃상여에 실려 건너는, 사람과 자연이 공존하는 다리가 바로 진천 농다리다.

안타까운 것은 이처럼 자연친화적인 돌무더기의 농다리 바로 옆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공폭포가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다. 인공폭포는 돌이 아닌 플라스틱 재료를 이용한 것이다. 돌처럼 흉내를 낸 조악한 모습으로 농다리 주변 전체의 자연스러운 풍광을 해치고 있다.

농다리에서 미호천과 접근해 걸을 수 있는 길은 좌측 방면으로 용고개(살고개)를 넘어가야 한다. 용고개 정상에는 오래전부터 있던 성황당이 현재도 남아 있으며 고개를 넘으면 바로 초평저수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용고개에서 충북학생종합수련원(충북 진천군 문백면 농다리로)방면으로 임도를 따라 가다보면 초평천 위에 놓인 화산교를 지나 미호천의 일곱 번째 지천인 초평천과 미호천의 합수부가 등장한다.  (취재지원 미호천 지킴이 전숙자·임한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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