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혜숙 칼럼] 세상의 딸들
[오혜숙 칼럼] 세상의 딸들
  • 충청매일
  • 승인 2015.12.29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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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혜숙 수필가

내 어머니는 연속해서 딸을 낳았다.

첫째 언니를 비롯해 딸 다섯 중에 내가 네번째니 나를 낳고 부터는 제대로 된 산후 조리나 미역국을 편히 누워서 얻어먹었을 리가 만무다. 바로 위 언니까지는 집안의 항렬로 이름을 지었지만, 여동생과 나는 집안의 항렬을 무시한, 끝에 숙자가 들어가는 이름을 어머니가 손수 지었다.

어찌 보면 태어날 때 뭐 하나 달고 나오지 못했다는 이유로 축하 받지 못하고, 그 당시 인기 있던 여자 탤런트 이름을 따라 지었다고 어머니는 쓸쓸히 말했다. 그래서 동생과 나는 공교롭게 숙자매가 되었다.

전후 베이비부머 세대인 우리는 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태어나자마자 세상의 빛도 못보고 죽임을 당하던 슬픈 세대다.

분홍 잇몸에 흰 싹 같은 이빨이 뾰족하게 나오고 아장아장 걸으며 재롱을 부릴 때쯤엔 태어날 때 서운했던 감정도 잊은 채 부모의 사랑을 받고 컸다는 것쯤은 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서늘해지고 가슴 한쪽이 저릿했다.

내가 네 살 무렵 여동생이 태어난 날 이불 속 어머니는 벽을 보고 모로 누운 채 소리 없이 울고 계셨다. 동생이 태어난 것을 기뻐하지 않은 집안 분위기를 어린 내가 어찌 알까! 그때 내 바로 위 언니의 초등학교 입학을 위해 책 표지를 말없이 아버지가 싸주고 있었다.

등에 메는 밤색의 가죽 가방에 이것 저것 챙겨 넣고 있는 아버지 주위에 앉아 있던 손위 언니들도 말이 없었다. 눈물 흘리는 어머니의 젖가슴을 철없이 파고들었던 나는 아직도 그 광경이 선명하다. 네 살 때 기억을 몇 십 년이 지난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다니, 어린나이에도 사무침이 있었나 보다.

4년 뒤 어머니는 원했던 아들을 드디어 낳았다. 몇 달 뒤면 마흔인 어머니는 위험이 내포된 노산이었다. 대문엔 자랑스레 붉은 고추가 달린 금줄이 걸렸다. 그때서야 어머니는 삼칠일동안 맘 편히 산후조리를 할머니에게 받았다.

남동생 태어난 것이 어찌나 기뻤던지, 7살 인생은 동생의 태변 기저귀를 들고 한걸음에 개울가로 가서 빨았다. 3월 초순 집 앞 개울물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두 손은 새빨갛게 변해 아리고 시렸다.

난 어릴 때부터 예쁜 여자 아이보다는 남자아이처럼 상고머리에 바지를 입혀 어머니가 데리고 다녔다. 본의 아니게 사내애처럼 컸지만 나 또한 어느 날 일가를 이루고 첫아이를 낳았다. 종일 산통 끝에 딸이 낳은 외손녀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어머니가 처음 한 말은 아이고 가여워라! 이었다. 아마도 자신이 많은 딸을 낳아 그것의 감정이 섞인 손녀에 대한 한탄조였다. 내가 손녀가 기쁘지 않으냐고 재차 물으니 손녀 이전 세상의 딸로서 언젠가 대를 이어 이런 어미처럼 출산을 할 고통이 가여워서 그렇다는 것이다. 내 딸이 태어나는 해 즈음엔 남녀 성비 불균형으로 남아선호 사상이 극심했던 시절이었다.

새천년이 지나며 세상은 많이 변했다.

아들과 딸을 떠나 아이를 낳지 않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다포시대란 말이 항간에 유행어로 떠도는 서글픈 청년들 세상 속에서 딸아이는 그 옛날 내가 제 아비를 만나 일가를 이뤘듯 짝을 만나 일가를 이뤘다.

부디 그들의 세상은 딸들이 태어나도 축복 속 당당히 어여쁘게 키우는 세상이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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