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혜숙 수필가

집 방향 시내버스 안이 혼잡하다.

하교 길 학생들과 승객들로 엉킨 버스 안은 서로의 어깨와 몸이 스치고 닿으니 앉아도 서도 영 불편하다. 예전엔 어려움 없이 이용하던 대중교통인데, 벌써 내 몸은 편리한 자가용에 길이 들었나 보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몸의 중심을 잡고 서 있기가 운동하는 것 보다 더 힘이 든다.

그때쯤 내 앞에 앉아 있던 사람이 내린다. 언제부터인지 나는 주위를 돌아보지도 않고 좌석이 비면 냉큼 앉는 나이가 됐다. 나이를 떠나서 주변인에게 양보하지 않고 앉는 것은 몸과 마음이 늙고 있다는 것이다. 버스 창밖으로 무심히 지나가는 바깥 풍광이라든지, 거리사람들 구경에 호기심이 많은 나는 눈이 지루하지 않다.

평일 낮 시간 버스 안에는 사실 중장년의 남자들이 거의 없다. 그들은 한창 근무지서 하루의 일용할 밥벌이에 충실하고 있을 테니 당연히 학생들과 중년 여성들, 그리고 노인들이 대부분이다. 정류장에서 버스가 서고 그때 한자리 건너 앉아 있던 카키색 패딩의 여대생이 벌떡 일어나 크게 소리를 친다.

-저기요, 거기 서 계신 분!

일제히 사람들의 시선이 여학생한테 집중된다. 다시 여학생은 호기도 당당히 더 큰소리로 거기 모자 쓴 남자 어르신~ 하며 정확하게 한사람을 지목해서 자리를 양보하고 있다. 분명 그 여학생은 늘 해 왔던 것처럼 자신의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양보하듯 자연스러워 보인다.

지목당한 남자노인은 민망한 건지 아님 젊은이에게 자리나 양보 당하는 나이가 됐다는 것이 못내 싫은지 와서 앉지를 않는다. 사실 여학생이 양보한 자리는 운전석 바로 뒤였고, 노인이 서 있던 장소는 거의 버스 중간부분이었다. 사람들로 꽉 찬 버스 속을 헤치고 와서 앉기가 더 불편할 수도 있다. 그 노인은 끝내 여학생의 진심어린 배려에 동참하지 않았고, 자리는 빈 채 누구도 앉질 못했다. 얼마 뒤 보다 못한 내가, 학생 그냥 앉아서 가요. 한마디 하니, 그때서야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겸연쩍게 앉는다.

나이든 어른들한테 자리양보를 안하는 청소년들의 인성교육을 한탄하던 뉴스와 딴판으로 내가 직접 목격한 광경은 마지못해 자리를 양보하는 모습이 아닌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모습이다. 밝고 싹싹한 그녀가 미래에 만들 가정 분위기가 따듯하게 상상 된다. 나와 한 정류장에서 내리는 그녀에게 잘 가라는 인사를 하니, 그녀도 발랄하게 화답을 한다.

그때 휴대전화 벨이 옷 주머니 안에서 다급히 울린다.

오전에 며칠 전 예약한 가구 값을 치른 매장 주인 전화였다. 미리 준비한 돈 봉투로 물건 값을 건네니 무심히 사장은 돈을 확인하지 않고 그냥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곤 은행창구에 가서 입금하려고 헤아리니 5만원이 더 왔다는 이실직고의 전화다. 셈이 똘똘치 못한 내 탓으로 그냥 가지셔도 몰랐을 텐데요, 하니 그 돈 갖는다고 부자 될까요! 하며 휴대전화 저편에서 웃는다.

얼굴에서 살아온 내력을 읽을 수 있다더니, 시골 훈장님 같은 면모를 풍기는 가구점 사장은 마음 씀씀이 또한 그렇다.

아직도 세상은 살만하다. 이 인정미 없고 팍팍하다는 세상살이에 버스 속 여학생이나 초로의 가구점 사장님이나 다 내 주변세상을 환하게 하는 진정한 스승들이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