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충주농고 교장 수필가

한해가 마무리 되는 세모(歲暮)의 섣달이다.

지나간 날 대지가 타들어가듯 모질게 가물어 애만 태우던 이 땅에 간밤에는 첫눈이 하얗게 내렸다. 지난날의 아쉬움, 슬프고 괴로웠던 일, 모두가 펑펑 쏟아지는 저 눈송이 속에 삭아 들어가는 듯 했다. 가뭄 끝에 내리는 첫눈! 포근한 어머님의 품안처럼 모든 갈등을 덮어주고, 깨끗하고 하얀 천사의 손길 같은 사랑이 느껴진다.

초등학교 어린 시절 첫 눈이 내리던 날! 마냥 즐겁기만 했다. 눈 내리는 운동장을 멍멍이와 같이 줄 다름치고 친구와 눈싸움도 하며 눈사람을 누가 더 크게 만드나 하고 즐기던 동심(童心)을 더듬어본다.

요즘은 눈이 와도 사람들은 어쩐지 기뻐하지 않는 것 같다. 와! 눈이 온다 하고 탄성을 질러도 예전과는 달리 교통대란부터 걱정할 뿐이다. 아이들도 엄마와 함께 눈사람 만드는 모습을 보기 드물다. 그만큼 세상이 삭막하고 싸늘하게만 느껴진다. 그렇지만 내 가슴속에는 어린 시절 만들었던 그 눈사람이 아직 마음속에 녹지 않고 남아 있어 어렵고 힘들 때는 내게 다정한 친구처럼 다가와 위로해줄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첫눈이 소리 없이 내리면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만나고 싶은 향수에 젖어든다.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산길을 무한정 걷고도 싶어진다.

첫눈이 오던 날 찻집 창가에서 아내와 마주앉아 펑펑 쏟아지는 눈송이를 바라보며 함께 차를 마시며 따듯한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고 창밖을 바라보던 옛 생각에 흠뻑 젖어든다.

첫눈이 내리던 날 마음이 아련한 것은 나이가 들수록 내 마음을 달래주는 사람이 가까이에서 멀어져 가는 것 같아 두려워서 그런지도 모른다. 또 온 세상에 눈이 내려 푹 쌓이면 어머니의 품같이 포근하고 따듯한 정이 생겨나고 쌓이는 눈만큼이나 새해에는 풍년의 꿈을 이루리라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리라.

첫눈은 하늘이 내리는 축복이요, 공평한 사랑의 손길이다. 죽은 자의 무덤에도, 산자의 지붕에도, 고속도로와 꼬불꼬불한 산골길에도, 차별없이 내린다. 부잣집 장독위에도 가난한 아버지의 등허리에도 공평한 분배의 법칙은 꼭 지켜 내린다. 인생의 삶이 종말에 가서는 누구에게나 공평해진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

첫눈은 공평성을 바탕으로 갈등과 균열을 봉합해준다. 한마디의 말도 없이 싸움과 분노, 상처를 한순간에 고요히 침묵의 힘으로 덮어 버린다. 그러기에 첫눈은 인간을 거듭나게 하는 용서의 손길이 아닐까. 눈 내리는 길을 걸어가는 인간의 뒷모습을 보라. 그 얼마나 겸손하고 경건하며 아름다운 발자국을 남기고 가는지를…….

첫눈을 밟고 걸으니 갑자기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시 한구절이 떠오른다.

‘답설야중거(踏雪野中去) 불수호난행(不須胡亂行), 금일아행적(今日我行踏) 수작후인정(遂作後人程).’ 눈 내리는 들판을 걸어갈 재 발걸음을 함부로 어지러이 걷지마라. 오늘 내가 걸어간 이발자국은 마침내 후세들에게 길이되리라.

첫눈이 내리는 길을 걸으며 이 시를 생각하면 마음속에 미움과 증오, 탐욕이 가득한 마음도 깨끗이 사라질 것만 같다. 첫눈이 내려 이 시대의 모든 갈등의 지붕을 새하얗게 덮어 하나가 됐으면 싶다. 갈 곳 없는 노숙인의 추운 발걸음에도, 리어카를 끌고 폐지를 줍는 근로자의 가슴속에도 더 많은 첫눈이 내렸으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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