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혜숙 수필가

가을걷이를 모두 한 들판위로 11월의 텅 빈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가을을 마지막으로 보내는 계절 속으로 어김없이 겨울이 오고 있다.

절기상 입동도 지났다.

올해의 대입 수능 날은 입시 한파도 없다. 여름에 시작한 긴 가뭄이 가을까지 이어지더니, 반갑게도 요 며칠 동안 제법 굵은 빗줄기가 온 산야를 고루 적신다.

비의 곡조는 유순하다. 빗물받이 통속으로 쓸려 내려가는 물소리가 경쾌하고 명랑하다. 비가 그친 대기는 청량하고 코끝에 닿는 냄새는 상큼하다.

손에 보따리를 들고 어린 동생을 앞세워 걷는 아이들 등 뒤로 멀리 마을 고샅길이 보인다. 갈래머리를 한 누이와 털목도리를 한 사내아이를 컴퓨터 그림 속에서 보며 예전 동생과 내 모습을 떠올린다.

이웃 마을 심부름이라도 갈라치면 늘 어머니는 언니나 동생과 짝을 지어 보내곤 했다. 어린 발걸음에 뱀처럼 긴 시골길은 한없이 멀고 더디기만 했다.

그러나 그 먼 길도 충실한 언니로 동생을 채근하며 다녀오곤 했다. 집안에서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질 않아 아옹다옹하며 다투기 일 수라 부모님께 야단도 맞았지만, 집밖을 나서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서로를 의지해 씩씩하게 다녀오곤 했다.

바로 밑 동생은 학교 다닐때 형제들 그늘에 가려 제대로 된 부모님 칭찬도 받지 못했지만 사실 자력으로 고등교육까지 마친 당찬 아이였다. 평생 병으로 주머니 가벼운 아버지를 둔 우리 형제들은 대부분 스스로 학업을 이끌어 갈 수밖에 없었다.

성년이 되어선 일가를 이뤄 사는데 바빠 서로를 챙길 새도 없이 숨 가쁜 세월을 보내며 여기까지 왔다.

일복 많은 동생은 어려운 환경의 생활 속에서도 워킹맘으로 늦둥이를 건사하며 여전히 맹렬한 삶을 살고 있다.

그 동생과 함께 어린 날 집을 나서 심부름 길을 떠나는 것처럼 일주일 가까이 바다 건너 중국여행 길에 접어든다.

이제는 어쩔 수 없는 세월의 신산함이 동생과 내 얼굴에도 깊숙이 내려앉았다. 예전처럼 생기 있는 생들은 아닐지라도 우리는 어린 시절처럼 서로를 의지한채 시원찮은 건강을 염려하며 숙소에서 짐을 푼다.

그러나 걱정은 기우였다. 어려운 여행일정도 신명나게 휘모리장단으로 잘 소화한다. 험한 악산이라고 등산 초보들이 태항 대협곡을 어찌 걸을 거냐든 우려는 한낱 걱정 일 뿐이다. 행복이 충만하면 없던 힘도 솟고 에너지도 바로 충전된다.

천 길 낭떠러지 벼랑 끝 잔도를 걸으며 서로에게 의지해 두려움도 금방 떨쳐낸다. 무릎수술을 한 동생의 산행은 무리였지만, 이 근래 들어 그녀가 그렇게 생동감 있는 얼굴로 환히 웃는 모습은 이번 여행의 덤이다. 우린 그 길의 끝에서 어린 날로 돌아가 현지사진사에게 기념사진도 찍어 한 장씩 나눠 갖는다.

꿈꾸듯 동생과 함께 한 시간이 어린 날 서로를 의지한 채 두려움을 떨치며 걷던 어느 시골길의 모퉁이에서의 기억처럼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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