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충주농고 교장 수필가

내가 만일 이 험한 세상을 살다 떠난 후에라도 더 좋은 세상으로 인도 될 수만 있다면 아니 그렇지 못하더라도 업경대(業鏡臺) 앞에 가 내 마음을 비처 볼 수는 없을까. 노경(老境)의 탓이런가, 그렇게 거울처럼 맑고 총명하던 내 마음이 요즈음 들어 점점 흐려지고 혼미(昏迷)해지기 때문이다.

집을 나오면서 문을 채우지 않는다든지, 내손을 떠나지 않는 손 전화를 찾느라 법석을 치기일수고, 작은 일에도 화부터 낸다든지, 책을 읽어도 끝까지 못 읽고 싫증을 낸다든지, 남이 잘되는 것을 시기하고 미워한다든지, 불우이웃이나 장애인을 보고도 못 본체한다든지, 무엇을 하고자 의욕이 생겼다가도 바로 식어버린다. 또 쓸 것이 마땅치 않아 며칠이라도 일기를 쓰지 않으면 무엇을 잃어버린 기분이어서 내 일상도 비탈길로 굴러가는듯했다.

왜 그럴까. 내 마음에 녹이 슬어서일까, 때가 묻어서일까, 그래 늘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닦아야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산수가 넘도록 살아온 노심에 어찌 때가 묻고 녹이 슬지 않겠는가.

이 세상에 부부보다 더 가까운 존재가 어디 또 있을까. 사랑은 외모로, 말로, 몸짓으로 나타낸다지만 정(情)이란 조용히 지열(地熱)처럼 자신도 모르게 마음의 맨 밑바닥에서 타오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서로가 사랑을 말하지 않지만 때로는 증오하고 짐승처럼 손톱을 세우기도 하지만 언제나 영하의 얼음장 밑에는 플러스 4도의 따스한 물이 흐른다. 미지근하지만 그래도 그것으로 50년을 넘게 살아오지 않았던가. 아내의 그 미지근한 정이 내 마음의 거울을 닦아주는 세정제(洗淨劑)가 아닐는지….

거울이 나의 외모를 보여주는 수단이라면 내 마음을 체크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내 마음을 누가 잘 알 수 있을까. 하늘일까 땅일까. 아니다. 그것은 나 밖에는 아무도 모른다. 내 행동을 지켜봐주는 거울이 내마음속에 있으니까. 나의 착한 행동은 거울에 반사돼 내 주위를 모두 기쁘게 해주고 나의 나쁜 행동은 나에게 뉘우침을 주는 그것이 바로 내마음속에 있는 거울이 아니겠는가. 사람이 살다 이승을 떠나 저승에가 업경대 앞에 서면 내가 살아온 선악(善惡)이 분명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그래서 성당의 종소리가, 산사의 목탁 소리가 그리도 애절하게 울리는 것일까.

이 세상 누구라도 마음속에 거울을 가지고 살아간다. 내가 바라는 꿈과 내 인생의 모델과 메토는 누구이며 2모작 인생에 걸맞은 삶을 만들어가는 것이 나 자신만이 할 수 있기에 내 마음의 거울은 바로 내가 아닌가.

누구나 아침에 일어나면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듯이, 집을 나설 때는 머리를 빗고 옷매무새를 살피듯이, 그렇게 외모만 살필 것이 아니라 마음도 날마다 깨끗이 닦아 진실이라는 거울 앞에 비추어봐야 하지 않을까.

내가 웃어야 거울 속에 나도 웃듯이 내가먼저 다른 사람에게 공감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가져야 세상도 따뜻한 바람이 일 것 아닌가. 그러기에 일기를 빠짐없이 쓰고 글도 지어 내 마음의 거울부터 닦고 싶다. 이 세상을 살다가 저승에가 업경대 앞에 서면 누구라도 선악이 분명해진다고 말하지만 누가 업경대 앞에 서본 사람 있는가. 그런 사람이 없다하더라도 나는 살아 있을 때 녹슨 마음을 자주 닦아 저승에 가 업경대(業鏡臺) 앞에 서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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