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문석 시인

무릇 모든 생명은 부족과 혈통에 따라 삶의 방편이 다르다. 음지에서도 잘 자라는 나무가 있는가 하면, 양지에서만 잘 자라는 나무가 있다. 우듬지가 하늘로만 치솟는 교목이 있는가 하면, 줄기가 옆으로만 뻗어가는 관목이 있다. 모두들 그 방편에 따라 자신들만의 영토를 차지하고는 한 세상 영위하다 유전자를 후손에게 물려준다.

음지의 침엽수 한 쌍이 흙 속에서 뿌리를 얽으면 양지의 활엽수 한 그루는 무덤에 눕는다. 까치는 키 큰 나무의 우듬지에 둥지를 틀고, 오목눈이는 키 작은 덤불에 새끼를 친다. 더러는 절벽에 알을 낳기도 하고, 늙은 나무의 구새 구멍에 족보를 새기기도 한다.

벌 나비와 달콤 동맹을 맺은 꽃들도 절대 약속을 어기지 않는다. 가문에 따라 계절을 정해 놓고는 때 되면 어김없이 창문을 열었다 닫는다. 진달래와 개나리는 봄날에, 봉숭아와 해바라기는 여름날에, 국화와 구절초는 가을날에, 동백과 복수초는 겨울날에 자신만의 얼굴을 세상에 내밀었다가 거둔다. 그때마다 벌 나비는 그들에게 종족 보존의 열락(悅樂)을 주고, 그만큼의 꿀을 얻어 문패를 치장한다. 동고동락이며 상부상조이다.

새벽녘, 산중엔 엷은 안개가 둘러 퍼진다. 그런데, 누가 우화(羽化)하는 것일까? 썩은 둥치를 흔드는 작은 날갯짓 소리. 그 소리에 퍼뜩 잠을 깬 옹달샘이 맑고 서늘하다. 맨 먼저 두 귀 쫑긋한 수토끼가 실연의 붉은 눈을 씻고 가면, 뒤를 이어 다람쥐와 청설모가 굴참나무에서 내려와 목을 축인다. 저만치 고라니 한 쌍은 아직도 다 못 푼 정회(情懷)가 있는지 서로의 모가지를 핥으며 내려오고, 밤새 이슬을 베어 물던 물억새가 수척한 치맛단을 흔들기도 한다. 오늘도 때까치는 풀잎 향에 골똘하다.

그렇게 산중 사연은 갈수록 무성해진다. 서로 다른 부족이면서도 서로의 어깨를 맞대고, 서로 다른 혈통이면서도 서로의 눈빛을 나눈다. 품새를 앞세워 누구 하나 으스대지 않고, 덩치를 빌미로 누구 하나 주눅 들지 않는다.

모두는 제 숨결의 높이와 길이대로 음표를 빚는다.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태고 적부터 자신만의 향기와 빛깔을 알고 있다. 궁상각치우, 높낮이와 길이를 선험적으로 분간할 줄 안다. 또한 그것들이 어떤 마디에 들어가 어떤 높이에 자리 잡아야 하는지, 그리하여 어떻게 선율을 이루어야 하는지도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쓸데없는 욕심을 부리거나 남을 훼방하는 만용을 부리지 않는다. 앞서 가겠다고 새치기도 하지 않고, 더 높은 곳에 오르겠다고 뒷굽을 높이지도 않는다. 오로지 자기를 위한, 자기에 의한, 자기만의 음표를 빚을 뿐이다.

그러다 밤 되어 황홀한 직선의 별똥별이 허공에 오선(五線)을 그려 놓으면 누가 말하지 않아도 진종일 빚은 음표를 거기에 올려놓고는 일제히 탄주(彈奏)를 시작한다. 그런데, 도대체 누가 지휘하는 것일까? 완만한 능선과 능선 사이엔 셋잇단음표가 놓이기도 하고, 가파른 기슭엔 늘임표가 슬쩍 모가지를 빼기도 한다. 어디 그뿐인가. 건너편 바위 뒤에서 은근히 기다리고 있던 도돌이표가 미련 남은 음표들의 등허리를 회돌이치기도 하고, 능선이 밋밋하다 싶으면 슬쩍 변주를 하여 골골에 달빛 그늘을 늘이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어울리는 마디마디의 화음들. 그 금빛 화음에 온 우주가 넘실넘실 춤추는 것은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나도 얼른 짧은 붓 한 자루를 먹물에 적셔 음계의 맨 아래쯤에 던져 놓는다. 삼라만상이 저마다의 방편으로 일승(一乘)을 이루는 이 숲의 가장자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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