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십구일 째, 어느새 따뜻한 남쪽마을(전남 나주~영암군)

▲ 전남 영암군으로 가는 길가의 풀잎. 따뜻한 날씨 만큼 풀잎의 색도 달라진 느낌이다.

무서운 것들이 하나 없는

어두운 자연은 왜 그렇게

두려워하는지…

 

익숙함과 낯섦이 만들어낸

모순은 아닐까?

 

멧돼지와 폐업한 모텔

영화 ‘늑대소년’ 연상

 

전남 나주에서는 나주 곰탕을 먹어야 한다고 했던 선배의 말이 떠올랐다. 아침식사로 유명한 나주곰탕 집에 가서 먹겠다고 마음먹었지만 나주시를 벗어난 작은 마을 동네 길가에 있는 식당에 들어가서 먹었다. 커다란 다리 아래에 있던 식당이어서 규모도 굉장히 작았다. 식당에는 하루 종일 나 이외에는 사람이 올 것 같지 않을 만큼 한산했다. 

곰탕을 시켜 먹었다. 진한 사골국물이 허기를 달래는 데는 그만이었다. 식당 풍경에 비해 맛있었다. 포만감을 느끼며 나와 대로 밑으로 쭉 걸어서 나주를 벗어나고 있었다. 서울에서 보기 힘든 이발소도 보았고 시골다방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지방으로 내려올수록 오래전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오늘은 전라남도 영암군까지 가야하는데 꽤 오래 걸릴 듯하다. 부지런히 걸어야 어두워지기 전에 도착 할 수 있을 것 같다. 영암군으로 가는 길이 따뜻한 남쪽마을로 가는 기분이 들 만큼 길가에 난 풀잎의 색이 달랐다. 처음 국토대장정을 시작할 때 서울에서 출발하며 한겨울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어느새 봄이 오는 느낌이었다. 이제는 나무들도 잎을 틔우려는지 물이 올라 있는 모습이고 길가에는 이름 모를 들꽃이 피기 시작했다. 길 위에서 봄을 맞는 기분에 묘한 설렘이 있었다. 걷는 것도 조금 지체됐다.

 길가에 핀 냉이 꽃을 보며 걷는 길에 잠바도 벗고 싶을 만큼 기온이 올라가 몸도 나른해졌다. 목이 말라 슈퍼에 들러 커피도 한잔 사 마셨다. 슈퍼를 지키고 있는 할머니들과 수다는 기본.

잠시 휴식을 취하고 다시 길을 걷는데 국도변 한 주유소를 지나게 됐다. 그런데 이게 뭘까? 오른쪽 철장 안에 거대한 변이 있었다. 그 똥을 본 순간, 대체 무슨 동물이 안에 있길래 이렇게 큰 똥이 있는 것일 까 하는 생각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영업을 하지 않는 주유소 옆 철제 우리는 굉장히 길고 컸고 높이는 내 키만 했다. 설마 사람이 있지는 않겠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해보았다. 햇빛 때문에 눈이 부셨고 철 우리 안은 그림자로 자욱해 들여다보면서 걸어가고 있는데, 우리 앞에 다다른 순간 너무 놀라서 소리를 지를 뻔 했다. 검정색의 거대한 돼지다! 멧돼지가 철장 안에 씩씩거리며 앉아있었다. 거대한 풍채에 넋이 뺏겨 얼굴을 보지 못하고 몸만 보며 걷다가 돼지의 얼굴을 본 순간 이 친구가 날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충혈된 눈에 송곳니가 그대로 드러난 채 힘이 빠진 눈으로 날 바라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잠시 멈칫 할 수밖에 없었다. 화가 난 것인지, 갇혀있어 슬픈 것인지 알 겨를이 없다. 주변에 산이 많은 것으로 보아 누군가 사냥한 것일까? 갇혀있으니 답답하겠군. 불쌍하다. 등등의 생각을 하게 됐다. 하지만 누군가 우연히 한 마리만 사냥한 것 같지는 않다. 폐업한 주유소 주변에 거대한 우리가 길게 만들어져 있는 것을 보면 누군가 사육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아무래도 우리 앞에 앉아 있던 한 아저씨가 멧돼지 주인인 모양이다.

멧돼지의 눈빛을 뒤로 하고 다시 내 갈 길을 걸어 갈 수밖에. 노래를 흥얼거리며 휴게소를 지나고 언덕길을 올라가는데 자꾸만 멧돼지의 눈빛이 아른거렸다. 거대한 덩치에 비해 한없이 슬픈 눈빛. 하지만 이런 감상에 젖은 생각에 빠져 있을 수 없었다. 날이 점점 어두워져 뛰다싶이 걸었다. 길 한쪽은 산속 숲이 보였다. 점점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멧돼지를 본 것도 생각이 났고, 숲들이 무성한 곳을 오기 전 폐허가 된 주유소와 휴게소 그리고 역시 폐업한 모텔을 봤기 때문이다. 오래전에 문을 닫아 담쟁이 넝쿨이 무성한 모텔을 호기심에 자세히 보며 걸었다. 창문에 누가 서있다면 얼마나 소름 돋을까? 하는 한심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낮에 본 멧돼지와 폐업한 모텔의 상상이 겹쳐져 영화 ‘늑대소년(감독 조성희)’이 생각났다. 그 생각의 끝은 결국 내 옆쪽으로 늘어진 숲속에서 야생에 길들여진 사람을 먹는 인간이 뛰어나오면 어쩌나 하는 상상으로 닿은 것이다. 아닐 것이란 걸 알지만 어두컴컴한 시간에 속이 보이지 않는 숲은 스산한 감정이 일기에 충분했다. 영화에서는 송중기같이 잘생긴 늑대소년이었지만 정말로 현실에서 그런 물체가 나타난다면 멧돼지처럼 사나울 것이라는 것과 나는 영화배우 박보영이 아니란 것도. 야생에서 자란 인간이 나타나면 ‘늑대소년’에서처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불가능한 일이다.

세상에 없어야 할 위험한 존재, 늑대소년과 운명적 사랑에 빠지다! 요양 차 가족들과 한적한 마을로 이사 간 소녀(박보영)는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의문의 늑대소년을 발견한다. 야생의 눈빛으로 사람 같지 않은 행동을 보이는 소년에게 왠지 마음이 쓰이는 소녀는 먹을 것을 보고 기다리는 법, 옷 입는 법, 글을 읽고 쓰는 법 등 소년에게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법들을 하나씩 가르쳐준다.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을 향해 손을 내밀어준 소녀에게 애틋한 감정이 싹트는 소년.

그러던 어느 날 예기치 못한 위기 속에 소년의 숨겨져 있던 야생의 본성이 드러나고, 소년은 순식간에 마을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 되어버리는데… 가장 강렬한 캐릭터로 파격 변신한 송중기가 ‘늑대소년’이 되었다. ‘늑대소년’하면 영화 자체보다 배우 송중기가 먼저 떠오른다. 그만큼 송중기의 눈빛 연기가 압권이었다.

한국 영화사상 최초로 선보인 ‘늑대소년’은 체온 46도, 혈액형 판독불가, 세상에 없어야 할 위험한 존재로 설정돼 있다. 사람의 언어와 행동을 습득하지 못한 ‘늑대소년’은 거칠고 야생적이지만 영혼 깊은 곳에는 굉장히 여리고 순수한 성질을 갖고 있는 캐릭터다. 이러한 늑대소년의 이미지를 잘 표현하면서 강렬한 존재감을 발산한 송중기가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종횡무진 넘나들며 가장 주목받는 연기자로 거듭나게 된 작품이다. ‘늑대소년’이 배우 송중기를 위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만큼 앞으로의 연기변신을 기대하게 하는 작품이다.

송중기는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에서 조선 최고의 바람둥이 유생 ‘구용화’로,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의 고뇌하는 어린 세종 ‘이도’역으로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호평을 받기도 했다.

송중기는 ‘늑대소년’ 영화 촬영 전부터 직접 동물원을 찾아 동물들의 움직임을 관찰하며 연구한 것은 물론, 동물 마임 연습에 매진하는 등 캐릭터 연구도 열심히 했다고 한다. 송중기는 “사람의 언어를 익히지 못한 ‘늑대소년’을 연기하기 위해 눈빛과 표정, 몸짓 그리고 호흡만으로 모든 감정을 표현해야 했다. ‘늑대소년’에서의 도전은 연기 폭을 넓혀준 값진 경험이었고,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색다른 역할이기에 자부심이 생긴다”며 ‘늑대소년’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나타내기도 했다.

내가 본 멧돼지의 눈빛과 영화 ‘늑대소년’의 송중기 눈빛이 겹쳐지는 것은 그만큼 송중기가 맡은 배역을 잘 살렸다는 것이다.

날은 이미 어두워졌다. 계속 뛰며 걷다 영암군에 도착했다. 인적이 보이는 건물들이 나타나자 어둠 속에 있는 것이 무섭지 않았다. 그때부터는 천천히 걸으며 저녁에 무엇을 먹을지, 그것이 고민이었다. 그 와중에 식욕을 느끼는 내 자신이 참 어이가 없었고 웃음이 났다. 정작 무서운 것들이 널린 어두운 도시는 겁 없이 다니면서, 무서운 것들이 하나 없는 어두운 자연은 왜 그렇게 두려워하는지. 익숙함과 낯섦이 만들어낸 모순은 아닐까 싶다. 

글·사진/안채림

(광운대 경영학& 동북아문화산업과 복수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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