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조정래/대하소설 ‘태백산맥’의 저자

▲ 강원도에 조성되고 있는 명상센터 조감도를 그려 보이고 있는 소설가 조정래씨. 그는 자치단체의 역할은 주민의 삶을 살찌우는 영혼의 양식을 만들어주는 일이라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갖고 있는 문화적 자산을 활용해 문화관광자원화 시키는 일이 필요하고 충북의 경우 전국 어느 곳보다 문화예술 인적 자산이 많은 곳이라고 조언한다.

통일 후 우리 문학의 방향 제시해주는 상징적인 작품

홍명희, 민중언어로 민족정체성을 소설 속에 담아내

이념논쟁에 ‘벽초’ 조명사업 부진 안타깝고 부끄러워

지자체는 30년 후 통일 위해 벽초같은 인물 욕심내야

올해로 벽초의 생애와 문학을 조명하는 홍명희 문학제가 20주년을 맞았다. 홍명희 문학제는 벽초의 월북으로 인해 우리 문학사에서 단절된 채 그늘에 가려져 있던 ‘임꺽정’의 가치와 월북했다는 이유만으로 왜곡된 벽초의 삶을 재조명하는 역할을 해왔다. 음지에 가려져 있던 ‘임꺽정’은 ‘올 곧게 조선 정조에 일관된 작품으로 민족문학적 개성을 탁월하게 성취한 작품’으로 거듭났고 벽초의 삶은 ‘일생동안 애국자라는 명예를 잃을까봐 마음을 쓰며 살아온 중도주의자’임을 확인했다.

 

●‘임꺽정’은 작품에 스며있는 민중성과 리얼리즘 면에서 탁월한 작품이라고 평가받고 있는데 그에 비해 그동안 음지에 가려져 있었다. 같은 소설가로서 우리 문학사에서 ‘임꺽정’의 가치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겠나.

“소설 ‘임꺽정’은 한국문학의 걸작 중 걸작이다. 그럼에도 대학시절 국문학과를 다니면서도 ‘임꺽정’을 읽어보지 못했다. 금기시 됐기 때문이다. 그러다 ‘태백산맥’을 집필하던 무렵, 80년대 중반 체류탄 가스가 온천지에 터지는 상황 속에서 지성계가 깜짝 놀랄만한 일이 벌어졌다. ‘임꺽정’이라는 소설을 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경이로운 일이었다. ‘임꺽정’을 읽고 난후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확인했다. 당시 해방공간에서 한국전쟁이라는 현대사의 격동기를 배경으로 한 소설 ‘태백산맥’을 마무리하던 터에 4부 마지막 10권은 1953년 7월 휴전 협정 직후시기를 배경으로 하고 끝을 맺으면서 언젠가 11권으로 ‘태백산맥 통일편’이 나와야 한다는 생각을 했고, 그렇다면 통일 후 어떤 문학을 할 것인가라는 화두가 생겼다. 그에 대한 답을 ‘임꺽정’에서 찾았다. ‘임꺽정’은 향후 우리 민족이 통일이 되었을 때 작가들이 어떤 문학을 해야 하는지 좌표를 만들어준 상징적인 작품이다.”

조정래씨는 ‘임꺽정’을 읽으며 몇 가지 의문이 들었다. 첫째 왜 소설을 이렇게 시작했을까라는 질문과 서울로 돌아온 꺽정이의 행동에서 보여준 인물의 다양성, 그리고 소설의 끝이 없는데 벽초는 무엇 때문에 ‘임꺽정’을 썼을까라는 질문 등이다.

그에 대해 스스로 내린 결론은 이렇다.

“꺽정이가 갖고 있는 시대적 고민은 벽초의 고민이기도 하다. 벽초는 꺽정이를 통해 민족과 자신의 모습을 함께 투영했다. 벽초는 이념보다 민족이 우선인 중도주의자로서 일제 식민통치보다 민족분단을 더 나쁘게 생각했다. 오직 민족만을 생각한 벽초는 남쪽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강력하게 반대했지만 막지 못했고 결국 북에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왜 북에 남았을까? 북에 남은 그가 북에서 어떤 역할을 했을까? 누구보다 고민이 컷을 것으로 짐작된다. 작가로서 내가 할 일은 그것을 문학으로 구현해내는 일이다. 분단을 넘어선 작품을 쓰기 위해 취재 중이다. 언젠가 소설로서 벽초의 삶이 드러나지 않겠나? 격동기 벽초의 고뇌를 넘어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가보면 벽초가 소설 속에 담고자 했던 민족의 정체성문제가 이해된다. ‘임꺽정’은 일제가 문화말살정책을 펴던 시기에 민초들의 언어로 민초들의 이야기를 민초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한 소설작법이다.”

●소설 ‘임꺽정’과 벽초의 삶이 통일로 가는 징검다리가 될 수 있다는 말인데, 현실은 어려운 난관이 많다. 예를 들면 현재 충북작가회의가 진행하는 ‘홍명희 문학제’가 벽초의 고향인 괴산군에서 아직도 이데올로기를 내세워 반대하고 있다.

“분단은 우리민족의 최대 비극이다. 분단을 껴안고 분단으로 인해 갈등하고 고뇌하며 몸으로 부대끼며 살다간 예술가들을 이데올로기라는 틀에 가둬 한 단면만을 본다면 비문화적이고 야만적인 일이다. 우리 5천년 민족사를 놓고 본다면 분단은 100년에 지나지 않는다. 극히 짧다. 우리 역사 전체인 것처럼 여기는 어리석은 발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아직도 이념논쟁에 밀려 벽초나 ‘임꺽정’이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아내의 고향이기도 하지만 나는 충청도를 좋아한다. 충청도 사람들은 은근과 끈기가 대단하다. 일제 치욕 속에서 독립을 위해 목숨 바친 열사들이 많은 고장이다. 그래서 충청도에 깊이 감사하는 마음이 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이나 손병희 선생이 있고 벽초의 부친은 경술국치에 자결하지 않았나. 이러한 위대한 인물들이 많은데 비해 인물에 대한 조명사업이 부진해 보인다. 충청도가 열사의 고장이지만 전국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공부하기 위해 찾는가?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전국 지자체들이 예술가를 발굴해 조명하고 관광자원화 하는 추세다.

그 길이 지자체가 살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벽초는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이고 저항시대에 위대한 충청도 인물 중 한사람이었다. 통일이 가까워지고 있고 통일 후를 생각한다면 벽초같은 인물은 어느 지역에서나 욕심낼만한 인물이다. 벽초나 단재의 민족주의 정신을 지역의 정신적 자양분으로 삼아야 한다. 강원도는 오직 단편소설만을 남긴 이효석을 빛내기 위해 문학관을 만들어 관광자원화 하고 있다. 그에 비하면 충북에는 얼마나 많은 문화적 자산이 많은가. 지자체가 뭐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부끄러운 일이다. 괴산군이나 충북도가 시대 변화를 읽고 통일을 대비하면서 깊이 자성하고 고민해야할 일이다.”

●우리 민족이 통일시대를 준비해야 한다면 어떤 역할이 필요한지, 그리고 통일은 언제쯤으로 예측하나.

“통일이 막연하게 들리지만 실제는 구체적으로 예측할 수 있다. 광복 70년이 지났다. 앞으로 30년 후에는 통일이 가능하다. 100년, 북한의 3대 세습이 끝나는 시점이기도 하고 중국의 개방정책이 북한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중국이 자본주의 마성을 알게 된 것처럼 북한에도 자본주의 바람이 불고 있다. 바람과 물의 흐름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사유재산을 갖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막을 수 없다. 북한이 이미 배급을 포기하고 시장화, 자본주의를 도입하고 있다. 체제가 자연스럽게 붕괴될 것이고 그다음은 우리가 도와야 한다.

인간의 역사는 상극의 시대에서 상생의 시대로 전환하는 역사를 반복해 왔다. 모순과 갈등과 이기적인 권력으로 점철된 역사를 극복해온 것이 인간의 역사다. 그런 점에서 우리 민족도 곧 상극에서 상생의 역사로 전환해 갈 것이다. 지혜와 성실이라는 뛰어난 자질이 우리 민족에게 있다. 북한을 도와야 할 때 적극적으로 도와 상생의 길로 가려 한다면 그것이 곧 통일로 이어지지 않겠나? 그것이 우리 민족의 본질을 지켜가는 길이고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길이다.

세계화를 부르짖는 시대에 민족주의가 시대착오적일 수 있다. 하지만 무수한 외침을 받아온 우리 민족으로서는 방어를 위해 남북으로 분단된 우리민족의 공생은 꼭 필요한 일이다. 중국사람들이 묻곤 한다. 너희는 왜 형제끼리 반목 하냐고. 학교에서 반공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요즘의 젊은이들에게 민족주의 의식이 사라져 가고 있다. 하지만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인문학정신이 살아 있는 한 민족주의 정신은 소멸되지 않을 것이다. 통일시대를 준비하기 위한 우리의 역할은 인문학정신을 근거로 한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 것이다. 그것을 지켜내려는 사람이 10%만 돼도 가능한 일이다.”

●홍명희문학제를 반대하는 지자체에서 소설 ‘임꺽정’은 어떻게 해서든 활용해보겠다는 생각인 것 같다. 이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임꺽정’은 벽초가 만들어낸 자식과 같은 존재다. 홍명희는 배척하면서 ‘임꺽정’만을 취하겠다는 것은 뿌리 없는 열매를 거두겠다는 욕심이며 이율배반적인 일이다. 작가의 삶을 바로 조명해보지도 않은 채 단지 북으로 갔다는 사실 만으로 홍명희를 배척하고 ‘임꺽정’만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모순이다.

말로만 통일을 내세우며 어떤 노력도 하지 않은 채 이데올로기로 부추겨 국민정서를 양분하려는 못된 세력들이 있다.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있는 모순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이 사회를 변혁시키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지식인들이 나서 이러한 모순을 바로잡을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한다. 문화는 인간영혼의 총체다. 지자체는 문화적 가치를 확립해 사람들의 영혼을 살찌울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먼저 해줘야 한다. 반면 경제는 지자체가 할 일이 아니고 중앙정부가 나서야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지자체의 역할이 무엇인지 답이 나온다. 지역만의 고유한 문화유산을 확보하는 일이 중요하고 이것을 어떻게 주민의 삶에 연결 지을 수 있을지 고민하고 그 해답을 찾아 실행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충북이나 괴산군의 경우 벽초는 훌륭한 문화자원이고 이것을 어떻게 주민 삶의 질과 연관 지을 것인가 그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임꺽정’의 본질인 작가의 삶은 빼고 작품만을 갖고 가겠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일이다. 전국을 비교해보면 문화산업 투자에 충북이 지나치게 빈약하다. 얼마나 뒤쳐지는 행정인가?”

조정래 작가는 평창동계올림픽을 개최하는 강원도가 문화올림픽 일환으로 추진하고 있는 명상센터 마을에 촌장으로 입주한다.

2017년 문을 열게 될 명상센터는 강원도가 문화예술인들을 입주시키고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방문해 머물다 갈수 있는 산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마을이다. 전국이 이렇듯 문화예술 공간화하고 있는 추세에서 충북이 어느 정도 뒤쳐지고 있는가를 역설하는 대목이다.

 

▲ 청주예술의 전당에서 열린 20회 홍명희문학제에서 만화가 박재동·소설가 조정래씨·도종환 시인(왼쪽부터)이 소설 ‘임꺽정’과 벽초의 삶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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