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솔 홍익불교대학 철학교수

생각이 많아지면 경(敬)을 지킬 수가 없고 경이 무너지면 생각도 많아진다. 그리고 마음이 바빠지면 경(敬)을 지킬 수가 없으며 경이 무너져 내리면 마음에도 혼란이 온다.

경(敬)은 옮겨 다니지 아니하고 주인을 바쁘게 섬기지 아니하며 일에서는 서두르지 아니하고 애태워 하지 않는 마음이다. 하지만 마음이 무엇엔가 매이기 시작을 하면 생각은 급박하게 움직이고 또 다시 마음조차 생각을 따라 다니면서 경한 자세로 저절로 무너져 내리는 것이다.

그래서 경(敬)을 잃어버린 채로 학문(學文)을 한다는 것은 깨어진 독에다가 물을 붓는 것과도 같고 경(敬)을 잃어버린 채로 지혜(知慧)를 추구한다는 것은 물에 적신 나무에다가 불을 지피겠다고 성냥불을 그어대는 것과도 같다.

또, 경(敬)을 잃어버린 채로 충(忠)을 말하는 것은 풍란이 심한 바다에다가 돛단배를 띄우는 것처럼 위험하다. 이래서야 경(敬)을 섬기기는커녕 하나의 자신조차도 볼 수가 없고 무너져 버린 자신의 타락만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타락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악(惡)을 수반하지 않아도 타락이 된다.

잃어버린 자신을 보는 것도 타락이 되고 방황의 그림자를 보는 것도 타락이 되며 좌절에 시름을 하는 것도 타락이 되고 욕심에 매여서 끌려가는 것도 타락이 되는 것이다.

타락은 욕심 때문에 생겨나기도 하고 좌절 때문에 생겨나기도 하며 스스로를 잃어버리는 마음 때문에도 타락은 시작을 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타락은 조그만 한 것이 불씨가 되어 차츰 커다란 불길을 만드는 것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타락의 길에서 헤매지 않으려면 무엇보다도 자신의 주인을 충실히 섬기는 자세가 필요하다.

한편 어려운 문제에서나 방황의 시간에서도 타인을 통하여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방황과 간난 그리고 고통과 좌절은 사람을 따라 다니는 그림자와도 같기 때문에 내가 방황을 할 때에는 그도 간난과 좌절과 고통의 어느 한 가지 문제에서든지 방황(彷徨)을 하기 마련이다.

물론 사람이 항상 방황을 하는 것은 아니지만 방황은 어느 누구에게나 잠재되어 있는 일상생활의 일부분인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방황을 타인(他人)과 함께 의논하려고 하지만 타인도 또 다른 타인을 의지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방황(彷徨)을 누군가와 의논을 하여서 해결하려는 것은 도움이 되지 못할 뿐만이 아니고 오히려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경우가 되기도 한다.

즉, 방황과 간난은 나의 문제이고 고통과 좌절도 내안의 문제이며 혼란과 방종도 내안의 문제가 된다. 따라서 오로지 고요한 경(敬)을 지키고 하나 된 경(敬)을 지키는 것은 내 안의 문제이지 밖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가 경솔한 가운데에서는 반드시 혼란한 마음이 따르고 스스로가 경건한 가운데에서는 반드시 고요한 행실(行實)이 따르는 것이다. 하여 모든 것 마음먹기에 따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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