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십육일 째, 제제가 가져온 설음식 도시락 (전북 정읍시~북이면 백양사역)

▲ 혼자 걷는 딸을 위해 설 연휴라고 제제가 도시락을 싸가지고 왔다. 할머니의 맛이 느껴지는 설음식이다. 훗날 이 도시락은 내 인생의 새로운 목적지가 필요할 때 나를 그곳으로 데려다 줄 것이라 믿는다.

설 연휴에 응원하러 온 제제가 반가워 꼭 안았다

보기만해도 묵직한 배낭이 시선을 잡아끈다

하루 함께 걷기로 했는데 저 무거운 것을 어쩌나

명절 음식을 먹을수 있게 준비해준 사랑이 눈물겹다

설 연휴라 어디든 사람의 흔적은 많지 않았다. 국토대장정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찜질방에서 묵었다. 오늘은 제제가 설음식을 싸가지고 나를 응원하러 오기로 한 날이다. 찜질방에서 나와 제제를 마중하기 위해 정읍 기차역으로 가는 길에 친구들에게 쓴 편지를 우체통에 집어넣을 수 있었다. 전주에서 듬뿍 산 엽서와 우표가 친구들에게 소식을 전하는 힘을 발휘하는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우표를 사두지 않았더라면 모두 문을 닫은 연휴에 엽서가 갈 길을 찾지 못하고 배낭에서 뒹굴었을 테니까. 

제제를 처음 본 순간 너무 반가워 꼭 안았지만 보기만 해도 묵직한 배낭이 내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 안에 담긴 도시락보다 하루를 함께 걷기로 했는데 저 무거운 배낭을 어쩌지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아마도 걷는 일은 내가 선배일 수밖에 없으니. 우선 먹어 배낭의 무게를 줄이는 게 최선이었다.

우리는 서로 안부를 묻고 자리를 펴고 앉아 음식 먹을 장소를 물색해야 했다. 설 오전이어서 다방도 문을 연 곳이 없었다. 다행히 농협마트가 문을 열고 영업을 하고 있었다. 무작정 들어가 휴게소를 찾았고 2층에 고객휴게실 문이 열려 있었다. 우리는 테이블위에 도시락을 펼쳐놓고 편안하게 먹을 수 있었다. 무거운 배낭 도시락에는 그리웠던 할머니표 음식이 가득 담겨있었다. 명절이 되면 늘 먹던 쇠고기 산적, 육전, 버섯전, 주먹밥 등등. 길을 걷는 와중에 명절 음식을 먹을 수 있게 해준 제제의 사랑이 눈물겨웠다. 너무 맛있었다.

최대한 배낭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 많이 먹었지만 한계라는 것이 있다. 아무리 맛있는 것도 배가 부르면 끝. 우리는 도시락을 정리하고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절반 이상의 길을 걸어와 혼자가 익숙해진 터라 제제가 뒤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종종 잊었다. 자동차가 다니는 길을 걸을 때는 제제를 보호하기 위해 내가 뒤에 걷곤 했는데 제제가 느려 몸이 부딪치거나 내가 앞서 나가곤 했다. 처음에는 알지 못했으나 제제의 걸음은 한없이 더디기만 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늘 제제가 나보다 한발 먼저 씩씩하게 걸었다. 보폭이 나보다 넓고 빠르니 호기심 많은 나는 이곳 저곳 둘러보다 제제를 놓치기 일쑤였다. 22살이 된 지금 나는 제제보다 10cm 이상 커버렸고 그때의 호기심을 그대로 가지고 이곳 저곳 휘젓고 다니는 것이 전혀 어렵지가 않다. 이런 나를 쫓아오는 제제는 예전과는 다르게 신기하고 낯선 공간보다는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하늘을 올려다보거나 냇가를 내려다보는 일이 잦아졌다. 30년의 시간 차이가 이렇게 커다란가보다.

차가 앞에서 오는 것을 보며 걷는 것이 걷는 사람에게는 더 안전하다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오늘같이 차들이 많은 날은 왠지 모르게 운전자와 눈이 마주칠까 조심스럽고 숙쓰러웠다. 오늘은 유독 설을 보내고 서울로 올라가는 차들이 많았다. 혼자라면 조금 움츠러들었겠지만 제제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가니 훨씬 좋았다. 역시 명절엔 가족과 함께해야 하는 걸까? 혼자 걸었다면 조금은 쓸쓸했을 날이었다.

이렇게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가니 하며 하천 둑을 걷기도 했고 마을길을 걷기도 했다. 둘이 걷다보니 여기저기 볼거리가 더 많았다. 마을 골목이 예쁘면 마을을 한 바퀴 돌기도 하고 빈집이 있으며 들어가 사진을 여러장 찍기도 하고 토끼집을 발견하면 토끼를 불러내 놀기도 했다. 버스정류장 의자에 앉아 쉬면서 지나가는 자동차를 구경하기도 했고 우물을 새끼줄로 묶어 놓은, 민간신앙을 상징하는 풍경을 만나기도 했다.

그러다 난코스를 만났다. 국토대장정을 시작한 이래 가장 힘들었던 구간은 전주에 도착하기 전날 비 때문에 너무 추웠던 일이다. 다음이 지금 제제와 걷는 구간이다. 내장산, 오봉산 등 주변에 산이 많아 가파른 고개를 넘어야 한다. 백미터를 넘다 쉬어야 할 만큼 험난한 고갯길이 이어졌다. 만약 제제가 없었으면 그대로 주저앉았을 코스다. 정읍을 떠난지 서너시간이 지났을까? 걷다 서다를 반복하며 우리는 결국 고갯길 정상에 올랐다. 정읍시를 떠나는 사람들에게 안녕히 가세요하는 푯말이 너무 반가웠다.

정읍 농협마트에서 먹은 아점이 소화가 다 되었다. 정상 고갯길 한쪽에 도시락을 펴고 남은 설음식을 마저 먹었다. 이제야 배낭이 가벼워 질 것이다. 오봉산 고갯길 정상에서 먹게된 두번째 도시락은 여전히 싫증나지 않아 아마도 평생 잊지 못할 음식이 될 것 같았다.

인도영화중에 <런치박스(리테쉬 바트라 감독)>가 있다. 많은 사람들이 아는 것처럼 흥겨운 노래와 화려한 춤이 들어간 발리우드 스타일과 다른 영화다. <런치박스>는 노래와 춤이 배제된 감독만의 생각과 개성이 담겨 있어 오히려 더 인도스럽다.

감독이 인도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치 무겁고 잔잔한 영화는 뭄바이를 배경으로 한다. 인도 뭄바이 특유의 분위기와 느낌이 그대로 살아 있다. 발리우드 영화나 할리우드에서 만든 인도영화는 인도라는 나라의 색감과 노래 그리고 춤을 어떻게든 집어넣지만 이 영화는 시각적인 장면보다는 사람들의 삶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 중 뭄바이에 사는 인도인들의 삶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뭄바이 가정집에 초등학생 자녀를 둔 평범한 주부 일라는 남편과 소원해진 관계를 되살리기 위해 회사로 맛있는 도시락을 싸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뭄바이에는 다바왈라가 유독 활발히 활동하는 곳이다. 다바왈라는 직장인들에게 자기 가정에서 만든 밥을 먹게 배달해주는  사람들이다. 뭄바이에는 매일 아침 5천여명의 다바왈라들이 가정에서 회사로 도시락을 배달한다. 대부분 문맹인 다바왈라들은 색과 기호를 도시락 통에 새겨놓아 섞이지 않도록 구분해 주인에게 정확하게 배달하는데 한 치의 오차도 없다. 

하루는 일라가 남편에게 보내기위해 정성스럽게 도시락을 싸지만 600만번에 한번 일어날까 말까한 다바왈라의 실수로 인해 남편이 아닌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는 사잔에게 보내진다. 도시락을 받아먹게 된 사잔은 도시락 통에 쪽지를 넣어 보내게 되는데 일라는 배달 실수를 모른척하고 계속해서 사잔에게 도시락을 보낸다. 둘은 계속 쪽지로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된다. 아내가 죽고 자식도 없이 외롭게 지내는 사잔에게 일라는 삶의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둘에게 친구 이상의 감정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런 와중에 남편의 외도를 알게 된 일라는 집을 떠나기로 생각한다.

“잘못 탄 기차가 목적지로 데려다 주기도 한다.”

일라의 대사처럼 뭄바이라는 도시에서 외롭게 살아가던 두 남녀가 뜻하지 않은 계기로 일상의 행복을 찾게 된다. 두 사람은 잘못 전달된 도시락으로 인해 새로운 목적지를 찾게 된다는 이야기다.

학창시절 소풍을 가거나 수학여행을 갈 때 제제는 도시락 안에 쪽지편지를 써 놓어 주곤 했다. 글 쓰는 게 직업이어서 매사에 글로 뭔가를 표현하는가 싶은 생각을 했지만 그런 일은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정성스러운 마음의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영화였다. 설음식이 담긴 도시락과 같이.

계획은 북일면이었지만 늦어져 북이면 백양사역을 오늘의 종착지로 삼았다. 백양사역에 도착할 즈음에 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북이면은 작은 시골의 면단위 마을이었다. 기차역 근처 여인숙에서 묵기로 했다. 주인이 천주교인이란다. 종교가 같다는 것 때문에 우리는 괜히 기분이 좋았다. 좋은 방을 주겠다던 아주머니의 말을 듣고 올라가니 방이 깨끗하고 따뜻했다. 제제가 싸온 도시락중 남은 음식들을 마저 먹었다. 그 많던 것이 드디어 깨끗이 비워졌다. 오랜만의 집 밥이고 정성이 담긴 도시락이었다. 국토대장정을 하겠다고 했을 때부터 반대하지 않고 응원해준 제제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 제제가 싸온 도시락은 살아가면서 언젠가 새로운 목적지가 필요할 때 나를 그곳으로 데려다주는 역할을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또 특별한 추억을 하나 더 만들게 된 하루였다. 

글·사진/안채림

(광운대 경영학& 동북아문화산업과 복수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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