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십이일 째, 청춘을 되돌릴 수 있을까(논산시 연무읍~익산시 금마면)

▲ 논산시 연무읍에서 벗어나 전북 익산시 금마면으로 가는 길에 60, 70년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세트장을 옮겨 놓은 것 같은 풍경을 만났다. 오래된 이용원과 사진관 건물이 발길을 멈추게 했고 이 시설을 운영하던 할머니를 만나는 행운까지 얻었다.

노부부 청춘을 바친 사진관·이용원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채 낡아가는 건물

옛 일터 주변을 거니는 노부부를 보며

무엇인지 모를 감정이 뱃속을 채운다

 

논산시에서 벗어나 오늘은 전라도로 들어가는 날이다. 어느새 반도의 반을 넘어서 전라도라니. 왠지 해남이 눈앞에 있을 것만 같았다.

 연무읍을 떠나면서 익산으로 가는 길에 논산 훈련소 입구가 있었고, 훈련소 앞에는 거창해 보이지 않고 평범한 백반집들이 즐비했다. 논산시에 특별한 놀 거리가 없음에도 잘 꾸며진 팬션을 안내하는 표지판도 심심하지 않게 찾아 볼 수 있었다. 아마 훈련소로 떠나가는 아들이나 연인들이 마지막 밤을 보내고 마지막 식사를 하기 위한 식당과 숙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낮 거리는 한산했다.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식당들이 문을 닫은 것인지, 열어놓기는 한 것인지 조차 알 수 없었다. 분명 점심시간이 다가오는데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손님들이 거리에 그토록 없는데 겉으로 보기에 식당들은 전혀 긴장하고 있는 눈치가 아니다. 대부분의 식당들이 닫혀있어 나는 어디서 허기진 배를 달래야 할지 몰랐다.

마침 문을 연 식당을 발견했다. 그 곳마저도 메뉴는 한 개밖에 가능하지 않다고 한다. 아주머니는 한가한지 내 곁을 왔다 갔다 하시더니 결국 궁금한 내색을 했다.

“뭐하는 사람이길래 그렇게 큰 가방을 메고 여자 혼자 여기까지 왔느냐?” 라던가, “남자친구면회를 왔느냐?” 등의 질문들이었다. 마치 심심하셨던 찰나에 왠 말동무인가 싶은 느낌이었다. 아주머니와 지금까지의 여정에서 사람들로부터 받은 비슷비슷한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고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식당을 나왔다. 덕분에 나도 심심하지 않게 밥을 뚝딱 먹을 수 있었다.

‘님은 먼 곳에’를 흥얼거리던 연무읍을 벗어났다. 금마면으로 가는 지방도에는 유명한 성당이 하나 있다 해서 그곳을 들려 볼까 했다. 가는 길에 뜻밖에 아주 오래된 사진관과 이용원을 발견했다. 60, 70년대 드라마 세트장을 보는 듯했다. 제제도 어린 시절에나 가보았을 법한 아주 오래된 건물이었다.

간판의 색도 다 바랐고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어떻게든 이 건물의 분위기를 사진과 마음에 담고 싶어 한동안 사진을 찍으며 서있었다. 고개를 박고 유리창 안을 들여다보고 길 건너에 서서 넓은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한참을 그렇게 해찰을 떨며 사진을 찍고 놀고 있는데 한 할머니가 다가 왔다.

할머니는 “뭐 볼게 있다고 사진을 찍어?”라며 웃었다. 할머니가 언제 와서 나를 보고 있었는지 나도 깜짝 놀랐다.

“재미있잖아요. 드라마에서 본 것 같은 풍경이에요. 왜 문을 닫았을까요? 건물 주인이 누구인지 궁금하네요.”

이렇게 쏜살같이 궁금증을 표현하자 할머니는 마냥 웃기만 하셨다. “내가 주인인데.”

“정말요? 궁금한 게 너무 많아요. 이 건물은 언제부터 있었는지, 오래전 모습 그대로인 것 인지.”

사진을 찍으며 상상하던 질문들을 직접 물어 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할머니는 웃으시면서 당신이 젊었을 때부터 있었다고 하셨다.

또 이발소를 운영하던 사장님도 바로 할머니라고. 마치 세월의 흔적을 눈앞에 마주하고 있는 느낌에 신이 나서 할머니의 얘기를 더 청했다.

할머니는 이 이용원과 사진관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다섯 명의 딸을 키우셨다. 동네 사람들의 머리는 당신이 책임지셨고 딸들이 시집갈 즈음에는 손이 떨려 이용원을 그만뒀다. 지금은 딸들이 잘 살고 있으니 이용원도 사진관도 더 이상 운영하지 않는다는 이야기….

두 가게가 있는 건물 뒤편에 할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계시는데 요즘은 적적하다고 하신다.

그래도 딸들과 사위들이 올 때면 북적북적해서 사람 사는 것 같아 행복하다고. 그 때 건물 뒤편에서 할아버지가 아코디언을 가지고 나오셨다. 할아버지는 우리를 발견하고는 “어떤 젊은 처자인데 그리 얘기를 하고 있냐”고 하셨고 할머니는 “다 쓰러져가는 건물을 찍고 있길래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라고 대답했다.

할아버지가 들고 온 아코디언은 막내딸이 선물해준 것인데 다리를 다쳐 더 이상 택시를 운전할 수 없게 된 할아버지의 유일한 낙이었다.

너무 신기했다. 그 긴 세월을 보내고 지금은 평온히 당신의 옛 일터 뒤에서 아코디언을 연주하고 이웃으로 마실을 다니며 사는 그 모습이 항상 보아온 나의 할머니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히 우리 할머니와 다른 삶이었고 그 세월의 흔적을 그대로 보고 있는데 뭔지 모를 따뜻한 감정들이 뱃속을 가득 채우는 느낌이었다. 왠지 오늘은 걷는 것을 멈추고 이곳에 머물고만 싶었다. 하지만 할머니도 동네 어르신들을 만나러 가야했고 나도 나의 길이 있으니 계속 걸어야 했다.

무언가 아쉬워 할머니에게 유명하다는 성당을 여쭤보니 길을 알려주면서 성당까지 데려다 준다고 하셨다. 아마 할머니도 나와 헤어지고 싶지 않았던 걸까. 성당 앞에 바래다 준 후  가던 길을 가시는 할머니에게 사진을 한 장 찍자 하니 부끄러워 하시면서도 좋으신지 활짝 웃으셨다. 그 뒤로 할머니는 할머니의 길로 나는 나의 길로 떠났다. 발걸음이 가볍다. 누군가의 인생을 잠깐 훔쳐보고 온 것 같아 설레고 좋았다.

할머니는 지금 주름살이 졌지만 젊은 시절에는 얼마나 아름다우셨까. 힘겹게 자식들을 키우고 세월이 흘러 자신을 돌아보았을 때 주름이 자글자글한 여자로서의 당신 보다 어머니, 할머니로서의 당신이 익숙한 모습을 어떻게 생각하실까. 차마 물어보진 못했지만 지난 세월에 대한 아쉬움이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용원을 손수 운영했어도 뽀글뽀글 파마 밖에 하지 않은 전형적인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영화 ‘수상한 그녀(황동혁 감독)’에서 오말순여사(나문희)의 처녀시절인 오두리(심은경)가 할머니들의 머리를 보고 했던 말은 “왠 부로콜리들이 모여있네”였다. 그 뒤로 오두리는 바로 미용실로가 머리를 바꿨다.

아들 자랑이 유일한 낙인 욕쟁이 칠순 할매 오말순 여사는 어느 날, 가족들이 자신을 요양원으로 보내려 하는 사실을 알게 된다. 뒤숭숭한 마음을 안고 밤길을 방황하던 말순 할매는 오묘한 불빛에 이끌려 ‘청춘 사진관’으로 들어간다. 평생 자식들을 부양하며 엄마로 살아온 오말순여사는 ‘청춘 사진관’에 가서 사진을 찍고 난 뒤 창창한 20대로 되돌아 간다. 여자로서 아름다움을 추구할 수 있는 나이. 청춘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 뒤 내용은 가족 코미디에 가깝지만 나는 20대로 살아가는 오말순 할머니가 다시 여자로서 설레는 그 마음을 공감하고 느낄 수 있었다. 긴 세월동안 여자이길 포기했으나 한 순간 뭇 남자들에게 사랑받는 젊은 여자가 된 모습은 길에서 본 할머니의 웃음에서 본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길에서 본 이름 모를 할머니는 인생이 평온해 보이지만 옛 추억들을 생각하면 여전히 설레지는 않을지.  글·사진/안채림

(광운대 경영학& 동북아문화산업과 복수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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