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십일째, 논산훈련소라면 진저리치는 대한민국 남자들을 생각하며(논산시 광석면~연무읍)

▲ 연무읍으로 가는길 ‘군사보호구역’ 푯말이 온갖 상상력을 자극한다.

남들과 다른 행색에 신경 쓰다보니

신호 대기 시간이 길게만 느껴진다

 

기다림과 군대, 영화 ‘님은 먼 곳에 떠올라’

성인이 된 후 곱씹은 영화 또다른 느낌으로

 

●논산시, 기다림과 군대, 그리고 운명

논산시에 머물며 시내 구경을 더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가야할 거리가 너무 많이 남았고 생각보다 일정이 자꾸 지체되고 있어서 시내보다는 좀 더 목적지와 가까운 남쪽 연무읍을 가기로 했다.

대한민국의 남자들이라면 연무읍에 대해 조금은 익숙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논산훈련소가 위치해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미 군대를 다녀온 학교 선배들이 논산 연무읍 하면 열에 일곱은 진저리를 치곤했던 기억이 난다. 다른 날보다 조금은 짧은 일정을 잡은 덕분에 오늘은 연무읍에 일찍 도착해 읍내를 돌아다녀볼 생각이다.

논산시를 지나칠 때에는 그동안 지나왔던 여느 시들과 다른 점을 느끼지 못했다. 문득, 시내의 한 신호등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무엇을, 혹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시간의 길고 짧음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기다림이란 개개인이 생각하는 정도에 따라 같은 물리적 시간임에도 길게 느껴지기도 하고 짧게 느껴지기도 한다. 혼자이고 여행 중이어서 후줄근한 차림으로 신호등을 기다리는데 남들과 다른 행색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짧은 신호등 시간이 길게만 느껴졌다. 논산이라 그런지 아무래도 이런 생각들이 군대와 이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유난히 길게만 느껴지는 이 신호등은 군대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나, 군대에 간 남자친구를 기다리는 여인들에 비하면 한없이 짧기만 할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는 누군가를 위해 길고 지루한 기다림을 해본 적이 있는지, 그렇게 스스로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짧은 신호등에서 느끼는 찰나의 순간이지만 여러 가지 생각들이 한꺼번에 떠오르는 것을 보면 기다리는 시간도 이렇게 사람마다 다 다르게 느끼고, 다르게 정의할 수 있는 것 같다.

논산시를 벗어나 연무읍으로 갈 때 국도를 이탈해 마을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구멍가게 하나 없을 것 같던 마을에 ‘등대아파트’라 쓰여 있는 큰 돌 표지석을 발견했다. 아파트는 그 비석에서 더 안으로 들어가야만 하는지 건물은 보이지 않았다. 바로 옆에 군사보호구역이라는 문구는 왠지 온갖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영화를 많이 본 탓인지, 군사보호구역이니 접근금지니 하는 문구를 보면 비밀에 가득찬 일들이 일어나는 곳일 것만 같아 터무니없는 이야기들을 만들어 내곤 한다. 예를 들면 ‘등대아파트’라는 곳은 군인아파트 일 수 도 있지만 그를 가장한 비밀 군사 지역은 아닐까 하는 그런 이야기들 말이다.

연무읍은 생각보다 한적하고 조용했다. 작은 동네라 그런지 시장 골목에는 문을 닫은 곳들도 즐비했다. 시장 안에 들어서자 리어카 위에서 파는 커피가 있었고 그런 오래된 풍경을 보자 문득 외할머니 생각이 나기도 했다. 외할머니가 해준 떡이 갑자기 먹고 싶어졌다. 떡집을 찾아 기웃거리는데 정육점이 보였고 거대한 고기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갑자기 떡이 먹고 싶은 생각도 사라졌다. 뽀끼스쿨이라는 떡복이 집이 보여 들어갔다. 매운 떡복이나 먹어야지.

배낭을 메고 들어서자 아주머니가 “남자친구 면회 왔냐?”고 물었다. 그게 아니고 그냥 여행 왔다고 말하자 “남자친구가 여기 있었으면 엄마가 혼자 안 보냈겠지!” 했다. 아주머니는 군대 간 애인 면회라도 온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영화 속 순이, 사랑일까 운명일까?

기다림과 군대라는 두 단어는 내리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고 노래를 흥얼거리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사랑한다고 말 할걸 그랬지, 님이 아니면 못산다 할 것을~.” 김추자 선생님의 ‘님은 먼 곳에’라는 노래다. 영화 <님은 먼 곳에, 이준익 감독, 2008>에서 수애가 부른 곡이다. 십대시절에 제제와 함께 본 영화지만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등장한 그 노래가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 있는데다 제제가 종종 흥얼거려 나도 따라 부르곤 하는 노래다.

순이(수애)는 종가집의 며느리로서 자식을 낳아야 한다는 시어머니의 독촉으로 남편 상길(엄태웅)을 찾아 베트남의 전쟁터로 간다. 베트남을 가기 위해 전쟁터 위문공연단 보컬이 되기까지 목숨을 잃을 뻔한 위험도 불사하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전쟁터로 남편을 찾아가야 했던 순이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더군다나 남편 상길은 결혼하기 전 사랑하던 여자가 있었기 때문에 순이를 아내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던 인물이다.

어렸을 때는 단순히 의문만 품고 깊게 생각해 보지 않았던 문제다. 분명 상길과 순이는 서로 사랑하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는데, 대체 왜 베트남의 전쟁터에 그를 찾아 가야 했는지 의아한 생각을 갖곤 했다.

하지만 성인이 된 지금 생각해보면 순이의 선택도 또 다른 사랑의 표현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불운한 시대였지만 전쟁터인 베트남에 남편을 찾아간 순이는 단순히 시어머니의 뜻을 따르는 게 전부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시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군대에 간 남편을 면회해 아기를 가졌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고 외아들을 떠나보낸 시어머니 곁에서 고통스럽게 기다림을 곱씹는 것 보다는 행동으로 남편을 찾아 나서는 일이 훨씬 의미 있다고 여겼을 테니.

그 시대에 흔히 있을 수 있는 사랑하는 관계가 아닌 부모의 강요에 의해 맺어진 부부지만 결국 당사자들은 운명처럼 부부가 되었고 그 운명에 순응하는 모습이 결국 순이의 모습이다. 남편을 만나지 못하고는 한국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순이의 절박함이 이제는 어느 정도 이해된다. 내가 좀 성숙해진 걸까. 기약 없는 기다림을 피하기 위한 순이의 발악들을 보았다고 해야할까. 마지막에 수애는 말없이 상길의 따귀를 때린다. 어쩌면 상길은 순이를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둘은 운명일수밖에 없는 부부로서의 사랑을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연무읍에서는 군복을 입은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군복을 입은 군인들을 보면서 ‘님은 먼 곳에’서 등장하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영화 속의 장면들을 떠올리곤 했다.

읍내를 지나서 1층 짜리 건물들이 즐비한 길을 스치듯 지나 오늘 묵을 모텔에 도착했다. 견훤 왕릉 터에 가볼까 했지만 쉬고 싶다는 유혹이 강했다. 영화에 대한 기억이 애잔하게 밀려오는 날이다. 사선을 넘어 남편을 찾아간 순이의 진짜 마음은 무엇이었까? 사랑이었을까? 운명이라는 굴레였을까를 고민하며 잠이 들었다. 글·사진/안채림

(광운대 경영학& 동북아문화산업과 복수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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