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영철 충북대 겸임교수

이사 때마다 아내의 핀잔을 받으며 열심히 모시고 다니는 화분들이 있다. 그 중에는 마치 나의 분신인양 애지중지 하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나와의 인연을 버릴 수가 없어 모시고 다니는 것들이다. 봄부터 가을까지는 옥상이나 실내계단에 두고 물을 주며 보살피면 되는데 문제는 겨울이다. 화초들이 대부분 추위에 약하다 보니 혹시 동해를 입을까봐 방안 이곳저곳에 빈틈만 있으면 화분을 갔다가 놓는다.

내 입장에서야 무거운 화분을 옥상에서 방안으로 옮기는 것이 큰일이지만 아내 입장에서는 겨우내 화분으로 인해 청소하기가 불편스럽다는 것이다. “여보 저 화분은 버리던지 아니면 필요한 사람 줍시다. 이제는 당신 혼자서 들기도 힘들고, 잘못하다 허리라도 다치면 그 고생을 어떻게 감당하려고요?” 작년 이맘때 쯤 이사를 결정하자마자 아내의 첫 일성이 바로 화분을 정리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왜냐하면 내 성격상 버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도 있지만 화분마다 이런저런 사연이 자꾸만 떠올랐기 때문이다.

가뭄이 계속되던 며칠 전 일이다. 아내가 이불을 널기 위해 옥상에 갔다 오더니 한마디 한다. “여보, 옥상에 있는 화분들이 가물어서 그런지 다들 축 늘어져 있어요. 그리고 어디서 날아 왔는지는 모르지만 잡초들이 화분마다 가득하네요. 당신은 날마다 화분에 물을 주면서 왜 잡초는 안 뽑아요? 화초를 키우는 건지 잡초를 키우는 건지….”

아내의 눈은 화초가 아니면 다 잡초로 보이는가 보다. 하기야 우리가 배워오길 보리밭에 밀이 나면 밀을 잡초라고 배웠으니 잘못된 말도 아니다. 50여년 전의 일이 문득 생각난다. 아버지께서 보은에 있는 선산을 가시다가 어떤 논을 보시더니 혀를 차셨다. “논에 저렇게 피가 많으니… 참 논주인도 게으르긴…” 그 때만 해도 나는 ‘피’가 무언지 잘 모르니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논에 피가 났어요?”, “그래 저길 봐라. 벼하고 비슷하게 생겼는데 벼보다 키가 큰 것 보이지? 저게 바로 피란다. 피는 벼가 먹어야 할 양분을 다 빼앗아 먹는 잡초란다. 그래서 미리미리 뽑아 버려야 하는데.”

그런 잡초인 피가 우리 몸에 좋다고 해 이제는 별도로 키운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이 세상에 잡초는 없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래서 나는 옥상에 있는 화분에 날마다 물을 주면서 화초 옆에 함께 크고 있는 잡초인 채송화, 쇠비름, 들깨 등을 뽑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그들이 어떻게 그곳에 왔는지는 나도 모른다. 그러나 얼마 있지 않으면 강인한 생명력과 의지로 예쁜 꽃도 피우고, 향긋한 냄새를 힘껏 발산할 것이다.

사람도 자연의 한 부분이니 그들과 똑같다고 본다. 어떤 사람은 독특한 재능이 있으나 주위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해 잡초 같은 대우를 받는 사람이 있다. 자신이 있어야 할 장소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면 분명 최고의 대우를 받아야 마땅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어느 누가 감히 잡초와 화초를 명쾌하게 구분할 수 있겠는가? 벼 속에 있는 피를 우리가 잡초라했지만 새로운 눈으로 보면 그것은 잡초가 아니라 식량자원으로 변신하는 것을 보면서 지나온 우리의 가치관이 제대로 작동했는지를 새롭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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