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일곱째 날, 다시 시작하는 기분으로(대평리~공주)

 

국도변 널린 쓰레기 더미·인도 없는 도로 ‘짜증’

어둡고 거대한 터널 앞 내 모습이 작게 느껴진다

어둠 뚫고 다시 만난 빛…영화 ‘사일런트 힐’ 연상

 

◇인도가 없는 국도, 사람은 안중에 없어

서울 치과를 다녀와 다시 대평리로 돌아왔다. 하루를 건너뛰었다. 주변의 유혹이 없지 않았다. ‘그만 해도 되지 않아?’ ‘계속 할 거야?’ 이런 물음들이 마치 나를 시험하는 것 같았다. 서울 갔을 때는 친구들을 일부러 만나지 않았다. 친구들을 만나면 혹시나 그대로 주저 앉을까봐, 내가 정말로 시험대에 오를까봐. 하지만 나는 그런 유혹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대평리로 돌아왔다.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정안을 향해서 길을 걸었다. 내륙 깊숙이 들어선 기분이다. 주변이 온통 산이었다. 바다가 없는 내륙 한가운데 충청도라는 사실이 실감 나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걸어온 다른 지역에 비해 사람들도 보이지 않았다. 산과 도로, 그리고 차량들 뿐 사방이 적막했다.

그 적막한 길에서 무심코 페트병을 발로 툭 찼다. 순간 페트병이 내 발의 압력에 의해 터지면서 노란 액체가 발등을 덮쳤다. 이게 뭘까? 너무나 당황스러웠는데 액체는 사방으로 파편이 튀면서 이상한 냄새를 풍겼다. 심한 오줌 냄새였다. 아뿔싸! 소변이었다. 페트병 속에 들어 있는 액체의 색이 노란색이라는 것을 보았으면서 그것이 오줌일 것이라는 상상을 하지 못한 내가 무척 바보스럽게 생각됐다. 운동화, 양말, 바지 등등 여기저기 오줌이 튀어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결국 내 종아리는 모르는 사람의 소변으로 뒤덮여졌다. 최악이다. 제제가 배낭에 매달아준 손수건을 생수에 적셔 닦아냈다. 화가 났다. 왜 사람들은 자신의 집 앞이 아니라고 함부로 쓰레기를 버리는 걸까? 심지어 국도는 그것을 치우는 환경미화원 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길을 걷다 보면 늘 갓길에 쓰레기 더미가 가득 차 있고 그 중 소변이 들어있는 페트병도 심심치 않게 본적이 있다.

이건 아마 자신이 그저 스쳐지나갈 길이라고만 생각하기 때문에 차를 타고 지나가다 창밖으로 내던지는 것이 아닐까. 대부분의 국도가 이렇듯 걷는 사람보다는 자동차 도로로서만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사람이 편안하게 걸을 수 있는 인도가 없는 곳이 대부분이고 지나가다 쓰레기를 버릴 수 있는 쓰레기통도 설치된 것이 없다. 오로지 차들만을 위한 길이다.  그런 점들이 해남까지의 여정 중 3분의 1을 걸어온 상황에서 나를 속상하게 만들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려니 하고 마음을 다스리며 다시 걷기를 시작했다.

오늘은 걷는 중에 처음으로 터널을 지나는 날이다. 정안으로 향하는 길에 차령터널이라는 이정표가 눈에 들어 왔다. 어둡고 컴컴한 터널을 어떻게 지나갈까 싶었다. 혹여나 차들이 나를 보지 못하고 치지는 않을지, 내가 중심을 잃고 차도로 넘어지지는 않을지, 뒤에서 괴물 같은 게 쫓아온다든가 앞에서 차가 아닌 귀신같은 것이 튀어나오지는 않을지. 이런 막연한 불안감이 한꺼번에 밀려 왔다.

어쨌든 터널 안으로 진입했다. 생각이 너무 깊었던 모양이긴 하지만 작은 조명등이 켜진 터널 안은 어둡고 차 소리가 증폭되어 나 자신이 그 거대한 공간안에서 작고 초라하게 움츠려 드는 기분이었다. 

터널 안은 차선 옆으로 사람들이 걸어갈 수 있는 것을 대비한 높은 벽이 있다. 그 벽 위로 올라가 걸어가는 것인데 발을 잘못 디뎌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큰 사고가 날 수 있다. 다행히 핸드폰 플래시를 손전등처럼 키고 미약한 빛이나마 나를 보호할 수 있도록 했다. 밖으로 나와 햇빛이 보일 때까지 손전등을 끄지 못하고 나왔다. 무척 긴장한 것이다. 그 플래시를 나를 향하게 해 내가 더 밝아보이게 했었어야 했는데 바보같이 손전등처럼 사용한 것이다. 혼자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겁내하던 터널을 벗어났다.

◇어둠을 뚫고 나오자 환한 빛, 영화 ‘사일런트 힐’

어둠을 뚫고 햇빛 밖으로 나오는데 갑자기 영화 한편이 생각났다. 안개 속을 걸어 나와 시야가 확보되자 ‘사일런트 힐’이라는 마을이 짠 하고 등장하던 영화 ‘사일런트 힐, 2006, 크리스토프 갱스 감독’이다. ‘사일런트 힐’은 온갖 괴물들과 귀신들이 나오는 공포영화다.

주인공인 로즈 부부에게는 입양한 딸이 있었다. 딸은 잠결에 줄곧 사일런트 힐로 가야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로즈는 자신이 입양한 아이를 데리고 사일런트 힐이라는 마을로 가고 있던 중이었다. 마을에 다다랐을 때 로즈는 사고가 났고 정신을 차려보니 딸은 사라진 상태였다.

사일런트 힐로 갔을 거라고 장담을 하는 로즈는 딸을 찾으러 차를 버려둔 채 사일런트 힐로 들어간다. 마을 사일런트 힐은 30년 전 화재로 뒤 덮여 버려진 마을이 되었고, 탄광이 묻혀있어 마을 밑으로 불에 타고 있는 탄광이 그대로 있는 상태다. 당연히 사람들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 말 그대로 30년 동안 버려진 조용한 마을이다.

로즈는 그곳에서 딸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들어간다. 그곳에서 로즈는 한 여자를 만났는데 그 여자도 딸을 찾아 헤매다 미쳐버린 사람이다. 무언가에 겁에 질려 있는 모습이었다. 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지만 갑자기 사이렌이 울렸고 영문을 알 수 없던 로즈는 사람들을 찾아보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건 날리는 재와 이상하고 괴기한 형태의 괴물들이었다. 사일런트 힐은 사이렌이 울리면 온 마을이 잿더미로 뒤덮이고 괴물들이 판을 치는 곳이다.

로즈는 딸을 찾다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자신이 입양한 딸에게는 쌍둥이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사일런트 힐 안에 있는 모든 괴물들은 그 쌍둥이의 상처받은 악한 모습들이 투영되는 존재들이었다.

결말은 로즈와 딸은 죽은 상태에서 사일런트 힐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 영화의 반전이며 압권이다. 죽은 사람들만이 들리는 사이렌과 그들에게만 보이는 이면의 사일런트 힐은 죽었던 한 소녀가 고통 받은 자신만의 세계였던 것이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사일런트 힐에 와도 그 어떤 사이렌 소리가 들리지 않으며, 마을은 그저 30년 째 죽어있는 황폐한 곳같이 보이는 것이다.

영화는 CD게임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는데, 매체를 변용한 영화들 중 가장 잘 만들어 졌다고 평가받는 영화중 하나이다. 게임 속에서는 주인공은 엄마인 로즈가 아니라 아빠가 딸을 찾아 헤매는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영화는 엄마라는 모성애를 강조함으로서 영화가 주는 스릴을 한층 더 높였다. 건장한 사내가 아닌 한없이 약하기만 하던 엄마가 비록 입양한 딸이지만 마음으로 낳은 딸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 그 모습 덕분에 영화가 주는 스릴과 감동이 더욱 진해지며 영화로서의 제 기능을 한껏 한 것이다.

어두운 터널을 뚫고 나오면서 문득 시야가 밝아졌을 때, 전혀 다른 세계에 온 것 같았다. 마치 ‘사일런트 힐’의 어두운 이면에서 로즈와 딸이 영혼으로서 집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장면처럼.

차령 터널은 나에게 길고 암묵적인 압박감을 주었는데 터널을 벗어났을 때는 내가 무언가 해냈다는 성취감을 주었다. 그 길로 탄력을 받아 더욱 힘차게 걸었다. 가는 길에 휴게소에서 돈가스를 먹었다. 어렵게 공주시에 도착했다. 오늘도 힘든 하루였다.   글·사진/안채림

(광운대 경영학& 동북아문화산업과 복수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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