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하 청주시립오송도서관 사서

내가 그 누구의 내가 되지 않았을 때 내가 마주한 나의 모습은 무엇인가? 한 집안의 아들로서, 한 기관의 직장인으로서, 누군가의 친구로서가 아닌 온전히 나 자신을 위한 나로서 마주한 스스로의 모습은 어떤 모습인 것인가. 또한 그러한 나를 바라보는 사회는 어떠한 것인가? 소설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직장에서는 우수한 영업사원으로 가정에서는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와 늙고 병든 어머니를 대신해, 아직 어린 누이동생을 대신하여 집안을 이끌어가는 가장으로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인물이다. 자신을 포기하고 가족과 환경의 필요에 의해 살아가지만 주위의 그에 대한 기대감이나 필요성만큼이나 그레고르 스스로도 자신이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해 이해하고 있으며 작은 불만을 가지고 있으나 그것을 엄청난 고통으로는 받아들이진 않는다.

그러한 점에서 그레고르는 어느 날 아침 자신이 한 마리의 벌레로 변해버렸을 때. 흉측하게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에 대한 놀라움보다 출근 기차를 놓칠 것에 대한 걱정이 가장 크다는 점은 놀랄만한 사실이 아니다. 그의 가족들은 흉측하고 괴이하게 변해버린 그의 모습에 대해 커다란 충격을 받지만 이러한 충격이 익숙해져갈때쯤 그들은 그레고르가 없는 삶(경제적이고 물질적인)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하고 곧 아버지는 사환으로, 어머니는 바느질로, 누이동생은 상점의 점원으로 자신들의 자리를 찾아간다. 그 속에서 그레고르는 가족에게서 사회에게서 버려지고 내몰리게 되며 잊혀진 존재로서,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채 인간으로서가 아닌 벌레로서의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 속에서 스스로에 대한 혐오를 넘어 체념을 통해 자신의 삶을 마감한다.

만약에 한 사람이 타인을 위한 삶을 살며 인간으로서가 아닌 하나의 도구로 전락해 버렸다면 그것은 도구로 만들어 버린 환경의 문제인 것인가 아니면 그들 자신을 환경에 의존하게 만들어 버린 그 사람의 문제인 것인가? 영업사원으로, 가장으로 그가 짊어졌던 것들이 내던져졌을 때, 아니 의도적으로 내던졌을 때 그레고르는 어떤 존재였을까? 한 사람 본연의 모습으로 사회에 내던져졌을 때 그는 어떠한 모습으로 사회에 서 있어야 했었을까? 또 가족은, 사회는 그를 어떠한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했고 맞이했어야 했는가?

어쩌면 이러한 질문들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더 적합한 질문이 아닐까 한다. 물질에 나 자신을 도구화 시키고 스스로의 정체성을 망각한 채 그것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환경을 위한 것이라고. 또한 가족과 사회와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우리는 스스로를 합리화 시키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또한 사회는 이러한 모습들을 차갑고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암묵적으로 키워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렇듯 20세기 초반을 살았던 카프카의 고뇌는 100년이란 긴 터널 속에서 생생하게 달려온 기차의 울림처럼 21세기의 우리에게 생생히 전달되고 있는 것이다. 프란츠 카프카 스스로가 이 소설을 통해 정확히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했는지는 풀어낼 수는 없다. 그만큼 ‘변신’은 그것이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나 지금이나 굉장히 다양하게 해석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카프카 자신 또한 스스로를 위해서만 글을 썼고 죽기직전 자신의 작품을 모두 불태워 달라고 했을 정도니까 말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 스스로 만족하는 삶이 아닌 타인에, 물질에 내 스스로를 종속시키고 도구화 시키면 안 된다라는 것을 느꼈다. 내면에 불안과 불만족감이 가득한 채로 그것이 내 가족과 내 주위를 위한 것이라며 스스로를 위안하면서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리는 진심을 외면한채 살아가지 않도록 말이다. 언젠가 내 몸에 걸쳐진 옷들과 화려한 장식을 걷어내고 내 스스로를 마주하였을 때 이대로 충분하다고. 그때의 나를 사랑할 수 있는 내가 되어 살아갈 수 있었으면 한다. 또한 그러한 나를 따뜻하게 맞아줄 사회를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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