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연 전 청주예총 부회장

어느 산골 선방(禪房)에서 수행하던 젊은 스님들 10여명이 따뜻한 봄날 ‘철엽’을 나갔다. ‘철엽’이란 개울가에 솥단지를 걸고 불을 지피며 밥을 짓고, 하루를 즐기는 ‘야유회’와 같은 것이다. 방안에만 갇혀 있던 혈기왕성한 젊은 스님들은 바깥세상에 나오니 고비 풀린 망아지처럼 이리저리 날뛰었다. 어느 괴짜가 스님하나가 “목이 컬컬하니 우리 곡차나 한잔씩 하세!” 라며 막걸리 통을 내려놓으니, 모두들  좋아라하고 우르르 몰려든다. “술을 마시려면 안주가 필요하지 않은가?”라더니, 개울로 뛰어들더니 물고기를 잡느라 야단이다. 매운탕을 끓이고 즐겁게 먹고, 즐겁게 놀며,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해가 저물자 모두들 개울가에 입을 깨끗이 씻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귀환하였다. 엄하기가 추상같은 큰스님께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보고하고는 잠자리에 들었다.

그날 함께 갔던 스님 가운데 원리원칙에 철저한 ‘고지식(?)’한 스님하나가 있었다. “허, 기가 막혀! 중놈들이 술을 마시고, 물고기를 잡아 살생까지 하고, 그리고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거짓말로 보고해?”라며, 큰스님을 찾아 낮에 있었던 ‘비행’을 낱낱이 고자질했다. 그러자 큰스님은 “알았다. 고얀 놈들. 내 단단히 혼내리라!”라며 돌려보냈다. 이튿날 큰스님이 모두를 모아 놓고는 어제 있었던 일을 문제 삼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저 놈을 당장 우리 선방에서 내쳐라! 우리 모임의 화합을 깨는 놈이다!”라고 고자질한 스님을 오히려 질책하는 것이다.

며칠 전 청주의 한 초등학교가 ‘수학여행’을 갔다. 마침 학부형 중에 도교육청 장학사가 교감과 친구지간이었다. 장학사는 친구인 교감에게 10만원을 봉투에 넣어 주며 “가는 길에 선생님들께 커피 한잔씩 대접하라!”고 했다. 교감은 그것을 별 다른 생각 없이 고맙게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이를 두고 전교조 충북지부가 ‘불법 찬조금’을 받았다고 문제를 삼았다. 결국은 문제의 봉투를 되돌려주었다는 등 뒤끝이 뒤숭숭하다. 친구인 교감에게 봉투를 전한 것이 대가성을 바란 ‘청탁’인가? 아니면 고맙다는 순수한 ‘인정’인가? 필자는 “어쩌다 이 지경까지 되었나”라며, 각박하고 삭막한 오늘의 교직사회에 탄식이 저절로 나온다.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를 ‘법(法)’라고 하다. 흔히들 “법대로 살자!”라고 한다. 한자로 풀어보면 법(法)이란 ‘水+去’로 되어 있다. 즉 ‘물(水)이 흘러간다(去)’는 뜻이다. 물은 아래로 흘러간다. 그러나 바위를 만나면 돌을 피할 줄도 안다. 돌아서 갈 줄도 알고, 웅덩이를 만나면 멈출 줄을 안다. 절벽을 만나면 폭포가 되기도 한다. 이것이 지혜요 방편이다. 지혜롭게 살려면 상황에 따라 융통성이 필요할 때가 있다. 이것을 ‘방편(方便)’이라고 한다. ‘방(方)’이란 ‘올바른 이치’라고 하며, ‘편(便)’이란 ‘올바른 이치를 교묘한 말로 전달한다.’란 뜻이다. 서양의 속담에 ‘예외 없는 법률이 없다.’는 말도 있다. 인정과 사랑과 신뢰로 얽혀진 사회가 학교다. 정겹고 싱그러워야할 교직사회가 너무 경직되고 삭막한 분위기로 흘러가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오월은 ‘청소년의 달’이다. 청소년은 내일의 주역이요, 우리의 희망이며, 미래사회의 주춧돌이다. 청소년을 건전히 육성하는 것은 미래의 초석을 다지는 길이다. 미래의 초석을 다지는데 최 일선에서 고생하는 분이 선생님이다. 선생님은 우리 사회를 떠받드는 기둥이다. 마침 내일(15일)은 스승의 날이다. 선생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은 우리의 미래를 다지는 길이다. 선생님들! 힘내시라! 여러분 앞에는 미래의 주춧돌인 청소년들이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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