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번역가

서기 200년, 원소(袁紹)는 관도(官渡)전투에서 조조의 군대에 크게 패하였다. 이로 인해 결국 울화병을 얻어 2년 후 피를 토하고 죽었다. 죽기 전에 장남 원담(袁譚), 차남 원희(袁熙)에게는 권력의 일부를 떼어 주고 셋째 원상(袁尙)을 후계자로 임명했다. 조조가 이 정황을 알고 원소의 하북 땅을 평정하고자 군대를 출병시켰다. 파죽지세로 달려 기주성에 이르렀다.

이에 원소의 아들들은 각기 네 방향으로 군대를 나누어 조조의 군대에 맞서 성을 사수했다. 조조의 총공격에도 불구하고 성은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이때 조조의 모사 곽가(郭嘉)가 꾀를 내어 아뢰었다.

“원소는 막내아들로 후사를 잇게 했고 다른 아들에게는 권력을 나누어 주었으니 이는 어설픈 패거리나 다름없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공격을 서두르면 그들은 힘을 합칠 것이 뻔합니다. 하지만 군대를 형주 쪽으로 돌려 유표를 치면서, 느긋하게 관망하시면 원소의 아들들은 서로 권력을 다투느라 분란이 발생하고 말 것입니다. 그때 단숨에 평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조조는 그 말에 따라 유표 토벌에 나섰다. 아니다 다를까, 조조가 철군하자마자 맏아들 원담은 셋째 원상으로부터 계승권을 빼앗고자 칼을 뽑아들었다. 하지만 원담은 주력부대를 소유한 원상에게 패해 조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조조는 이를 보고 때가 왔다고 판단하였다. 원담을 죽이고 곧장 기주성을 공격하여 원희와 원상을 물리쳐 하북 땅을 손아귀에 넣었다. 다행히 원희와 원상은 달아나 요동지방의 실권자 공손강(公孫康)에게 투항하였다. 이에 하후돈이 조조에게 책략을 건의했다.

“요동 태수 공손강은 오랫동안 우리에게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원희, 원상이 그에게 투항했으니 이는 후환이 될 것이 뻔합니다. 속히 요동을 정벌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러나 조조가 말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어디 있겠소. 며칠 후면 공손강(公孫康)이 그 두 놈의 목을 베어 올 것이요.”

조조의 신하들은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며칠 후 공손강이 원희와 원상의 목을 베어 보내온 것이었다. 신하들이 조조의 예견에 모두 탄복하고 말았다. 이에 조조가 통쾌하게 웃으며 모사 곽가가 죽기 전에 남긴 편지 한 통을 공개하였다.

“주군께서는 원희, 원상이 요동으로 도망친다면 서둘러 병사를 동원하지 마십시오. 공손강은 오랫동안 원소를 두려워해 그 두 아들의 투항을 의심할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공손강을 치면 도리어 서로 힘을 합쳐 대항할 것입니다. 하지만 느긋하게 기다리시면 공손강이 원소의 두 아들을 처리할 것입니다.”

이전에 공손강은 원소의 집안에 대해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품고 있었다. 이 둘이 투항해오자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조조의 공격이 걱정스러워 이 둘을 이용하려 시간을 조금 끈 것뿐이었다. 그래서 원소의 두 아들을 만나기 전에 우선 조조의 동향을 알아보게 했던 것이다. 조조의 군대가 요동에 대해서는 전혀 마음이 없는 것 같다는 보고를 받고서야 공손강은 즉시 원희, 원상의 목을 베어버렸다. 결국 조조는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목적을 달성한 셈이었다. 이는 ‘삼국지 곽가전’에 기록된 이야기이다.

격안관화(隔岸觀火)란 멀리서 적이 분열하여 서로 다투는 것을 구경한다는 뜻이다. 다툰 후에는 세력이 초라해져서 감히 아군을 대적할 수 없게 됨을 말한다. 야당이 정권을 차지하려면 무엇보다 백성의 신망을 받아야 한다. 그런데 요즘 야당 인사들은 개인 인기몰이에 빠져 대세를 망각하는 것 같다. 서로간의 분쟁과 내분이 그칠 날이 없으니 말이다. 집안이 시끄러우면 망하는 법이다. 이럴수록 인기보다는 지혜로운 전략가를 찾아야 할 때이다. 합심과 단결의 묘책을 찾는 자가 고지를 선점하지 않겠는가?aione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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