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진명 시인·충북예술고 교사

한나라는 그 전의 어지러운 시대를 통일하고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선택하여 장기간 통치의 기틀을 잡습니다. 그렇지만 그 뒤로 불교가 들어오면서 사실상 뒷방 늙은이 신세로 전락하고 맙니다. 수당 시대는 불교가 흥성하던 때였습니다. 이때 위기를 느낀 선비들이 유교를 새로운 논리로 치장하고 나섬으로써 신유학이 성립하는데, 나중에 송나라 때의 주자에 이르러 그 이론의 완성을 봅니다. 그래서 주자학이라고도 하죠.

이와 같이 성리학은 불교를 강하게 의식하고 성장한 학문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이론을 그대로 차용해 자기화 합니다. 그 과정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과연 외계 사물과 그것을 인지하는 사람의 마음이었습니다. 그것을 논리화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와 기라는 개념을 도입합니다.

그래서 성리학 이후 동양철학에서 이와 기는 모든 철학을 대표하는 개념으로 올라섰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강조된 것이 이 세상의 만물 속에 숨어있는 ‘이’였습니다. 기는 이를 드러내기 위한 도구이자 물질이고, 이 세상 만물이 움직이는 데는 거기에 합당한 원리가 있어야 한다는 당위론에 따라 이라는 개념을 설정한 것입니다. 당연히 다분히 관념화를 피할 수 없습니다.

이럴 때 아주 적절한 질문이 하나 나와야 합니다. 세상만물의 이치인 이는 마음 밖에 있느냐 마음 안에 있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주자학에서는 세계란 개인의 마음과는 상관없이 의연히 존재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개인이 사라진다고 해서 세계가 함께 소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개인을 넘어선 그 어떤 법칙이 있어야만 사회도 존재하고 왕조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이런 대답은 너무나 관념화된 것입니다. 생각이 그럴 뿐이지 실제로 그렇다는 것을 입증할 수는 없습니다. 마음 밖에 세상의 법칙이 따로 있다는 것은 마음이 작용할 틈을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에도 문제는 있습니다. 법칙이 마음에 딸린 것이라면 마음이 사라지는 순간 그 법칙도 함께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왕수인이라는 사람은 순수함에서 찾았습니다. 사람에게는 그런 법칙을 알아보는 순수한 마음이 있다는 것이죠. 그것을 그는 양지라고 표현했습니다. ‘좋은 마음, 순수한 마음’이라는 말입니다. 이 순수한 마음이 다른 욕망과 마주치면서 점차 가려지고 그것을 잃은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을 닦는 수행을 하고 공부를 하면 참된 진리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논의를 이렇게 압축하고 보면 어디선가 많이 본 낯익은 주장일 것입니다. 어디서 보았을까요? 불교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과 불성이 바로 이것과 비슷합니다. 그래서 주자학과 비교할 때 양명학을 심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왕양명의 전생이 스님이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성리학 자체가 불교를 비판하며 스스로 불교를 닮아간 이론이지만, 왕수인에 와서 더욱 거울 속의 자신처럼 닮습니다.

양명학은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좋은 안내서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에 아주 좋은 책을 만났습니다. 이 책이 그것입니다. 어려운 양명학을, 왕수인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손쉽게 설명했습니다. 아울러 왕양명의 철학을 이해하려면 전습록을 읽어야 합니다. 전습록은 왕양명이 한 말을 그의 제자들이 기억하여 정리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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