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명대 경영학과 교수

한 방송국에서 주말에 방영하는 주말 사극 징비록의 인기가 뜨겁다. 징비록(懲毖錄)은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이 쓴 책이다. 본래 ‘징비’란 “내 지난 일을 징계해 뒤에 근심이 있을까 삼간다”는 ‘시경’의 문구에서 따온 것이다. 징비록은 영의정이자 도체찰사로서 7년의 임진왜란을 겪으며 느꼈던 반성과 회한, 또다시 그 같은 환란이 닥치는 것을 막는데 필요한 대책과 마음가짐을 기록한 회고록이자 비망록이다.

징비록을 읽다보면 비분강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너무 많다. 1592년 임진년 4월 13일(음력)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이 서울까지 오는데 걸린 시간은 정확히 20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거의 아무런 저항 없이 조선은 수도 한양을 왜군에게 내어주게 된다. 1592년 4월 30일 새벽에 임금(선조)은 서울을 포기하고 백성들의 곡성을 뒤로 한 채 야반도주하듯 대궐을 빠져나온다. 사수할 의지가 없는 임금과 조정을 백성이라고 존중하고 지킬 턱이 없었다. 선조는 명나라와의 국경이었던 의주까지 파천(播遷)했다. 여차하면 국경을 넘을 판이었다.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함은 물론 심지어 우리나라를 합병해 달라고까지 했다. 스스로를 지킬 힘을 갖지 못한 나라의 비애였다.

1593년(선조 26) 1월 하순의 어느 날, 류성룡은 개성에 있던 명나라 제독 이여송의 군영에서 무릎을 꿇는다. 이여송은 “명군에게 군량을 제때 보급하지 않은 죄를 물어 군법을 집행하겠다”며 호통을 친다. 류성룡과 일행은 머리를 조아리며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한 나라의 재상은 왜 이런 수모와 치욕을 겪어야 했던 것일까? 이듬해인 1593년 정월에서야 이여송(李如松)이 이끄는 4만여 명의 명나라 원군을 앞세워 평양성을 탈환했다.

더욱 기가 막힌 일은 임진왜란으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잡혀 있던 선조의 장자 임해군은 자신이 풀려나 돌아갈 수만 있다면 한강 이남의 땅은 어디든지 왜국의 요구대로 떼어 주자고까지 했다. 당시 세자 0순위였던 임해군이 자기 한목숨 바쳐 나라를 지키겠다고 하기는 커녕 적장에게 나라 절반을 떼어 줄 테니 목숨만 부지해 달라고 구걸했던 것이다.

류성룡은 연일 이여송을 찾아 “빨리 명군을 진격시켜 일본군을 나라 밖으로 몰아내 달라”고 호소한다. 하지만 이여송은 “싸우려면 너희들이 직접 싸우라”며 거부한다. 그럼에도 류성룡이 채근을 멈추지 않자 군량을 핑계로 군법 집행을 운운하며 무릎까지 꿇리는 수모를 주었던 것이다. 우리가 징비록을 읽으면서 새겨야 할 사실이 많다. 리더는 강하고 신의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서울을 포기하고 몽진(蒙塵)에 오르는 임금에 대해서 백성은 신뢰를 보낼 수 없다. 서울을 버리고 간 임금과 조정에 대한 민초들은 불신과 분노만 품을 뿐이다. 의지가 없는 임금과 조정을 백성이라고 존중하고 지킬 턱이 없다.

대비와 실천을 하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이다. 징비록에는 뼈저린 반성과 질책, 그리고 후대에 대한 준엄한 경고가 담겨 있다. 준엄한 경고는 기업, 가정, 개인 모두에게 해당되는 사항이다. 류성룡은 ‘징비록’의 서문에서 “나같이 불초한 사람이 나라가 어지러울때 중대한 책임을 맡아 위태로운 시국을 바로잡지 못했으니 그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며 몸을 낮춘다. 그러면서 자신을 비롯한 조선 지도층의 과오와 무능을 사실대로 서술한다.

가장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때이다. ‘징비’의 정신을 계승하고 실천해야 할 때이다. 류성룡이 강조했던 안민(安民)과 양병(養兵)의 비전 실현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웃나라의 실상을 제대로 알고 대비해야 할 때이다. 내가 처한 곳에서 닥쳐올 위험한 일은 없는지 다시 점검해 봐야 할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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