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디제라티연구소장

우리나라 자연부락의 지명은 자연발생을 중심으로 한 지명이 상당수 많다. 특히 온천은 뜨거운 온수가 나온다고 하여 ‘온(溫)’자를 머리말로 해 온정리라는 지명이 많다. 또한 약수의 경우는 조선시대 임금이 많이 찾았던 곳은 온궁(溫宮) 또는 주왕리(駐王里) 등 왕이 머무를 것을 기념해 붙인 사례가 다수 있다.

‘동국천품’에 수록된 우리나라의 유명약수 다섯번째 소개는 아래와 같다

경상북도 평해(平海:현재 울진군) 30리 백암산(白巖山) 아래 소태곡(所台谷)에 온천이 있다. 이 온천도 충남 덕산 온천 발견 동기가 학(鶴)이지만 백암온천에서는 사슴이 알려주었다는 신령한 동물 숭상의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신라시대 한 사냥꾼이 창에 맞은 사슴을 쫓다가 날이 저물어 포기하고 그 이튿날 다시 사슴의 행방을 찾아 근처를 헤매던 중 상처를 치유한 사슴이 도망가는 것을 보았다. 이를 이상히 여긴 사냥꾼은 사슴이 누워 있던 자리에서 뜨거운 샘이 용출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뜨거운 샘이 발견된 후 인근 백암사(白巖寺) 스님이 돌무더기로 탕을 만들어 환자들을 돌보았으며, 고려 명종 때에 현령이 지방민을 동원해 거대한 화강암으로 큰 석함을 만들고 집을 새로 지었으며, 조선시대 때는 석조 욕탕으로 면모를 갖추게 됐다.

이처럼 땅이름이 온정(溫井)리로 붙여진 곳에는 온천이 솟아오른 곳이 많아 ‘온(溫)’자가 포함된 행정지명과 옛지명이 실질환경에 부합된 지명에 온천수가 잠재할 것이라는 전제 아래, 개발이 시작되거나 이미 개발된 곳이 있다. 또한 당시대 문인들은 이러한 온천을 다녀 온 후 그 감회를 시문으로 표현하였다.

강원도 고성(高城) 서북쪽 32리에 온천이 있는데, 고려 문종의 넷째아들인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고성 양진촌(養珍材)의 온천에 들어가서 습증(濕證)을 치료하였다고 전한다. 조선 중기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 화의가 성립된 후에도 청나라와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한 척화오신(斥和五臣)의 한 사람 이었던 신익성(申翊聖)이 지은 ‘유금강산소기(遊金剛山小記)’에 “탕천에서 목욕하였는데 이 온천은 금강산의 바깥쪽이다. 세조 때 목욕하시던 행궁의 옛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목욕을 마치고 양진역에 들었는데 村舍는 아주 누추했다”라고 해 이 온천에도 세조가 노춘정과 이곳에서 목욕을 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강원도 고성(高城)의 서쪽에 있는 노춘정(盧春井)이 있는데 동쪽으로는 금강산이다. 장령(獐嶺) 고개 정상에 작은 우물로 다만 송진의 아래로만 물이 고여 겨우 4, 5사람의 갈증을 해소할 수 있다.

물맛이 차서 뼈에 사무친다. 세조가 일찍이 관동 지방을 순찰할 때 유점사에 들렸다가 이곳에 행차했다고 전한다. 신익성(申翊聖)의 ‘유금강산소기(遊金剛山小記)’에 “노춘정이 있는데 행인들은 반드시 그 물을 마신다”고 해 옹달샘 정도의 크기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강원도 원주(原州)의 주천현(酒泉縣)에는 주천(酒泉:술샘)이 있다. 돌을 거두면 반쯤 부서진 돌구유가 있다. 명나라 문인 진계유(陳繼儒)는 해동(海東)의 명천(名泉)이라 했다. 전설에 의하면 이 샘에서 술이 나왔는데 양반이 오면 약주가 나오고 천민이 오면 탁주가 나왔다고 한다. 조선시대 한 천민이 양반 복장을 하고 와서 약주가 나오기를 기다렸으나, 탁주가 나오자 화가 나서 샘터를 부순 후 더 이상 술은 나오지 않고 찬 샘물만 나오게 됐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런 설화로 마을 이름이 주천리가 됐다. 요즈음 청주 초정약수와 관련한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특히 초정약수는 세종임금이 한글창제의 마무리 작업을 위해 장기간 머무른 곳으로 역사적 의미가 크다. 급작스런 사업성과 보다 기초 학술연구부터 토대를 갖추어 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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