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솔 홍익불교대학 철학교수

바람이 부는 것은 바람이 불어야하기 때문에 부는 것이 아니라 불만한 여건이 되었기에 부는 것이고 천둥이 치는 것은 천둥을 쳐야하기 때문에 치는 것이 아니라 칠 만한 여건이 되었기에 치는 것이요 또 친구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도 움직일 만한 여건이 되었을 때에 움직이는 것이고 구하려고 소원을 하던 것도 구해 질만한 여건이 되었을 때에 구해지는 것이다.

이처럼 세상만사가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고 그렇게 돌려지는 것이며 그렇게 감응(感應)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모여 앉아 세상사를 이끌어 보겠다고 말들을 하더라도 세상을 이끌만한 이치가 없을 때에는 헛된 메아리요 그림자가 될 뿐이다. 그러므로 어떤 일에서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하고 무엇을 조성해야 할 것인가를 먼저 명확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이때에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도 서로가 서로를 이끌고 뜻을 따르며 양보하고 힘을 합할 때에 발생하는 인화력(人和力)을 조성하는 일이다. 그래서 이러한 인화력이 있는 곳에서 내 자리와 발판이 생겨나며 내 발판에서 힘이 생기고 시기가 생기며 구함이 생기고 구분도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처럼 모든 일에서는 이와 같은 이치와 명분(名分)과 시기(時期)가 있을 때에 그 결실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나아감의 진퇴(進退)를 구분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할 때에 나아감에 알맞은 때인가를 구분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기를 아는 것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것이며 일에서 진퇴의 구분을 얻을 수가 있는 요령이 된다.

첫째, 태세가 갖추어 졌는가 하는 것이다. 옛 병서에서도 전투에 임할 때에는 시기(時期)와 지리(地理)의 태세(態勢)를 먼저 살펴야 한다고 했다. 여기에서 태세는 준비를 의미하고 마음을 갖춘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얻어야겠다는 욕심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욕심을 버릴 만한 마음이다.

둘째, 인화(人和)의 조화를 살피는 것이다. 어떤 일을 할 때에는 주변과 멀리까지 그 업무에 관하여 많은 사람들이 합당하다고 응(應)하는 경우에서 인화의 모습을 찾을 수가 있다. 즉, 업무의 명분이 정당한가를 살펴야 하고 그 명분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도 살펴야 한다.

셋째, 천지간(天地間)의 의견을 묻는 것이다. 제 아무리 시대가 복잡하고 과학화가 되며 혼란스럽다 하더라도 사람이 하는 일에서는 반드시 길흉의 변화가 많은 것이다. 이때에도 자신의 운성(運性)이 올바로 갖추어져 있을 때만이 혼란스러운 물질문명의 폐해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가 있다. 물론, 옛날이나 지금이나 자연 속에서 똑같은 숨을 쉬더라도 자신의 마음에 따라 운성(運性)의 오고감에는 많은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운성을 자신이 갖추고 있을 때에 진퇴의 구분을 명확히 할 수가 있고 느낄 수가 있으며 묻는 요령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특정한 방정식이 없다. 수학이나 과학은 어떠한 방정식을 따르다 보면 결론에 도달을 하더라도 천지자연(天地自然)의 이치는 방정식이 아닌 사람의 마음에다가 길을 일러 놓으셨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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