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솔 홍익불교대학 철학교수

사람들은 기도를 현실적인 소원성취 또는 현재 처한 고난을 벗어나는 방편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그러나 기도의 결실은 그 정도로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기도는 오도(悟道)의 한 방법으로서 수행의 걸음마 단계에 있는 사람에게 올바른 길로 나아가게 하는 훌륭한 길잡이가 되기도 한다. 또한 기도를 통하여 특별한 수행의 경지를 이루게 됨은 물론이요 도(道)를 깨닫는 경우도 많이 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살아있는 존재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죽음이다. 가장 두려워하는 것도 죽음이다. 만약 사람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다면…?. 그러나 지금껏 그러한 일은 없었다. 태어난 존재에게는 반드시 죽음이 찾아들고 생겨난 것은 반드시 사라지게끔 되어 있다. 그렇다고 하여 죽음이나 사라짐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 또한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다.

죽음이 있기 때문에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옛 성현들은 죽음을 “옷 갈아입는 일”처럼 받아 들였다. 옷을 오래 입어 낡았으니 새 옷으로 갈아입어야겠다며 담담히 받아들였다. 마이카 시대인 요즘으로 말하면 오래 탄 헌 차를 버리고 새 차로 바꿔 타는 것이 죽음이요 환생(還生)으로 본 것이다. 그럼 어떤 옷으로 갈아입고 어떤 차로 갈아타게 되는 것인가? 그 결정권은 “나 스스로 지은바 업”이 쥐고 있다. 살아생전 내가 지은 행위, 내가 추구한 바를 좇아 인연 처를 구하는 것이다.

극악(極惡)의 죄를 지은 사람은 지옥으로, 한평생 좋은 일만 하고 산 사람은 천상(天上)의 세계로, 탐욕에 찌들은 존재는 아귀(餓鬼)의 옷을, 뚜렷한 원력(願力)을 세운 사람은 그 원을 이룰 수 있는 좋은 환경으로 나아가게 된다. 자기가 지은 업의 에너지가 맞는 사이클을 찾아 파고드는 것이다. 그 모든 중생이 살아생전에 잘 살고 훌륭한 원을 세워 후에 좋은 곳에 태어난다면 무슨 근심이 있으랴?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 이웃 모두가 편안한 마음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죽은 사람의 한평생 업을 살펴볼 때 자유롭고 좋은 세상에 가지 못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경우도 많고 망인이 좋게 환생할 것 같지만 보다 더 좋은 세계로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을 뒤에 있는 사람들은 갖기 마련이다. 이러한 중생의 열망에 응하여 부처님께서 설하신 것이 천도법이다. 불보살의 크다큰 자리를 근거로 삶아 죽은 이를 보다 좋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영가 천도의 묘법(妙法)이 우리 불교 집안에 마련되어 있는 것이다.

죽고 사는 것까지 넘어서서 깨달음을 이루고자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깨달음이 다가서기 마련이다. 꼭 참선을 하여야만 도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도가 꿈속에서도 이루어지고 일념삼매(一念三昧)에 젖어들게 되면 깨달음의 문이 저절로 열리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열심히 정진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살아서나 죽어서나 행복이요 극락이 되는 것이다. 하늘을 나는 새들도 먹고 사는데 욕심이 없거늘 땅위에 사는 인간들이 어찌 욕심을 내서야…! 어차피 빈손으로 가는 인생이 아니던가? 살아생전 참 마음 찾기에 뜻을 세우면 죽어도 죽은 목숨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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