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솔 홍익불교대학 철학교수

우리 불자들은 기도를 한다. 불보살님께 마음속의 소원을 기원하면서 기도를 한다. 간절히 간절히 기도를 하고 마침내는 ‘소원성취’라는 결과를 이룩하게 된다. 간절한 기도에 소원성취, 그러나 이것은 불교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기독교, 이슬람교, 힌두교 등의 세계적인 종교나 각국의 민간 종교에서도 간절한 기도를 통하여 소원을 이루는 경우는 수없이 많다. 심지어는 집단 최면의 효과가 있는 타 종교의 ‘광(狂)’에 가까운 기도가 더 빠른 성취를 안겨주는 듯이 보일 때도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잠시 생각해 보자. 불교의 기도와 다른 종교의 기도는 같은 것인가? 불교만이 아니라 그 어떤 종교의 기도라도 똑같은 영험에 똑같은 결과가 있기 마련인 것인가? 아니다. 그렇지가 않다. 왜냐하면 기도 성취의 근거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불교의 기도는 불성(佛性),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참된 마음자리의 영원 생명, 무한 능력을 의지하고 개발하는 것인데 비해 타종교의 기도는 인간이 스스로 설정한 바깥의 절대적인 존재에만 매달리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기도를 하여 가피를 입은 사람은 자기의 참 마음자리 개발을 위해 꾸준히 수행하는 경우가 많고 타종교의 사람들은 자기 개발보다는 절대자를 위한 헌신으로 나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

이제 이러한 사실을 바탕에 깔고 불교의 기도 성취 원리와 옛 스님들이 수 없이 절을 하면서 기도를 하도록 한 까닭에 대해 보다 자세히 살펴본다면 불교의 절은 능례(能禮)와 소례(所禮)로 이루어진다. 곧 능(能)은 주체요 소(所)는 대상으로 능례는 절하는 ‘나’를, 소례는 그 절을 받는 불보살을 가리키는 것이다. 중생의 분별세계에서는 이 능(能)과 소(所)가 언제나 붙어 다니기 마련이다.

우리가 그토록 중요시하는 ‘나’도 ‘너’가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너’가 없으면 ‘나’라는 존재도 있을 수 없다. 사람인(人)자를 보라. 상대가 있기 때문에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상대적인 것이 결코 두 몸을 가지고 있거나 다른 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손등과 손바닥의 관계처럼 항상 함께 하고 있다. 곧 예배를 하는 이와 예배를 받는 분이 완전히 별개의 존재가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불이(不二)의 관계에 놓여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절을 하는 사람과 절을 받는 분은 무엇에 의지하여 손의 앞, 뒷면처럼 존재하게 되는 것인가?

그것은 우리의 참된 마음자리이다. 절을 받는 부처님은 참 마음자리를 회복해 가진 분이요, 절을 하는 우리는 참 마음자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제대로 발현을 시키지 못하고 있는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기도하는 우리에게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 또한 우리의 마음자리 능력을 한껏 끌어올리는 일이다. 만약 이렇게만 하면 절을 받는 부처님과 절을 하는 우리의 마음자리가 하나로 계합하여 어떠한 소원도 능히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의 참 마음자리! 모든 것은 이 마음자리로부터 생겨난다. 비록 이 마음자리는 특별한 모습이나 실체가 없지만 인연이 화합하면 갖가지 묘한 모습과 작용을 나타내 보이게 된다. 좋고 궂은 모든 일도 바로 이 마음자리에서 일어나고 기도 성취의 근원적인 힘도 이 마음자리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곧 기도를 제대로 하면 참된 마음자리에서 묘한 힘이 흘러나와 기도를 이루게 하는 것일 뿐 다른 특별한 존재가 있어서 감응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 불자들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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