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혜숙 수필가

찬 이슬이 내리는 한로인 절기도 지났고 흰 서리가 내리는 상강이 코앞에 다가왔다.

24절기의 순환이 일 년의 거의 끝자락에 와 있다. 상강의 절기엔 일 년 중 가장 풍성한 가을걷이로 바쁜 시기이기도 하다.

올해도 집근처 ‘풍년 골 공원’에는 일찌감치 찬란한 가을의 색이 점령했다.

공원 바로 앞 중학교에서는 사내아이들이 겉옷을 운동장가 벤치나 철봉위에 아무렇게나 벗어 걸쳐 놓고 운동을 한다. 들판의 야생짐승들처럼 뛰는 모습에서 싱싱한 땀과 파릇한 청춘의 힘이 느껴진다. 가던 길을 멈추고 한참을 담장 사이로 그 광경을 구경하다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는다.

새로운 도내 교육수장의 교육이념 때문인지 요즘 운동장 풍경에서 학생들의 체육수업이 많아졌다는 것을 느낀다. 전에만 해도 학교운동장 근처를 지날 때 아무도 없는 텅 빈 운동장을 보는 것이 예사였는데 말이다. 아이들 소리가 운동장 안에 가득이다. 건강한 체력 속에 아이들의 밝은 미래가 있을 것이다.

집밖을 나서면 일부러라도 내가 좋아하는 ‘풍년 골 공원’길을 거쳐 지나간다. 삭막한 도심에서 이런 공원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아담한 공원이지만 앉아 쉴 수 있는 정자가 세 개씩이나 있고, 곳곳에 나무 벤치와 운동을 할 수 있는 체력기구들, 그리고 약수터까지 있다.

나무사이 유순한 산책길을 걸으며 운동하는 사람들과 가을 햇살 아래 벤치에서 정담을 나누는 사람들, 그리고 약수터에 물을 길어가는 사람들로 공원은 늘 생기가 넘친다.

그 공원 속을 오가며 손에 무거운 짐이 많은 날은 나 또한 벤치에 앉아 한숨 돌리곤 한다. 공원 속 고양이들도 이제는 안면을 익혀 다가가도 녀석들은 도망치질 않고 빤히 눈을 맞추곤 한다. 습기 없는 맑은 가을 햇살 속 소나무 아래 잔디밭에는 젊은 엄마들이 햇솜 같은 아기들을 데리고 나와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여리고 예쁜 풍경들이다.

햇살 속 아기들이 어설프게 걸음마를 하다 엎어져도 기겁을 하며 달려가는 엄마들은 없다. 엄마들은 그저 바람과 햇살 속에서 아기들이 스스로 일어나는 법을 익혀야 한다고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오히려 지켜보는 내 눈이 동그래져 호들갑이다. 그들의 웃음소리와 아기들의 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풍년 골 공원’이 유쾌하게 출렁거린다.

늘 봐도 부지런하게 공원의 낙엽과 쓰레기를 치우는 공원관리 하는 노인과 마주친다. 어느 때 부턴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벌써 갈참나무 잎사귀가 반쯤은 떨어졌다. 공원의 나뭇잎이 다 떨어질 때 까지는 노인은 새벽부터 나와 오후 늦게까지 낙엽들과 씨름을 해야겠지만 얼굴 어디에도 조급함과 피곤함이 없다. 평생 근면했을 모습이 몸에 베어 있다. 근처 공원 다섯 곳을 관리한다는 노인은 바쁜 와중에도 미소를 잃지 않고 언제나 아는 체를 한다.

이 가을 ‘풍년 골 공원’이 아름답고 풍요로운 것은 저런 낮은 곳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노고의 손길이 있기에 가능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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