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솔 홍익불교대학 철학교수

“절은 절하는 곳이기 때문에 절이라고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불교에서는 절을 할 것을 많이 권합니다. 그럼 왜 그토록 절을 할 것을 권하는 것일까? 그 까닭은 모든 죄업의 근본이 되는 “나”를 비우고자 함에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참회를 할 때 다음과 같은 구절을 많이 외웁니다.

지난 세상 제가 지은 모든 악업은(我昔所造諸惡業) 무시이래 탐심 진심 어리석음이(皆由無始貪瞋痴) 몸과 말과 뜻으로 지었음이라(從身口意之所生) 제가 이제 남김없이 참회합니다.(一切我今皆懺悔)

이 계송을 조금 더 자세히 풀이해 봅시다.

우리의 악업은 지금 이 생에서만 짓는 것이 아니라 시작도 알 수 없는 아득한 옛날 무시 이래부터 지어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악업의 씨앗은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삼독심이며 삼독심에 의해 몸과 말과 생각으로 갖가지 나쁜 업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악업의 씨앗인 삼독심은 어디에서 생겨난 것인가? 바로 ‘나’에서부터 생겼습니다. ‘너’와 상대되는 ‘나’에서부터 모든 문제가 생겨난 것입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에 너무나 깊이 빠져 있습니다. ‘나’에게 맞으면 사랑하고 탐하며 나에게 맞지 않으면 싫어하고 미워합니다. ‘나’는 반드시 잘 살아야하고 ‘나’는 손해를 보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그 소중한 ‘나’에게 슬픔과 고난과 불행은 수시로 찾아 듭니다. 오히려 나의 꿈, 나의 욕심, 나만의 사랑에 사로잡혀 사는 동안에는 행복이 쉽게 찾아들지를 않습니다. 짧은 한 순간의 성취는 있을지언정 지속적인 행복과 자유는 더욱 멀리 달아나 버립니다. 그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나’라는 생각이 벽이 되어 ‘나’를 더욱 은밀한 밀실 속으로 가두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사방이 벽으로 둘러싸인 밀실 같은 공간…. 그 공간이야말로 지옥입니다. 벽이 두터 우면 두터울수록 ‘나’자신이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좁아집니다.

‘나’에 대한 집착과 사랑과 이익과 욕심에 깊이 빠져들면 마침내는 꼼짝도 할 수 없는 무간지옥에 갇혀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공간이 너무나 좁아 몸을 쉽게 움직일 수조차 없다는 무간지옥! 어찌 이것이 땅 속 깊은 곳의 지옥세계에만 있겠습니까? ‘나’의 욕심에 사로잡혀 이기적으로 살고 ‘나’만의 굴레에 갇혀서 살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이 서서히 무간지옥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나’의 이기심을 곧추세우면 주위가 지옥처럼 변해가고 ‘나’를 돌아보면서 ‘나’를 비우면 행복이 제자리를 찾게 됩니다. 절을 할 것을 권하는 까닭도 바로 이 ‘나’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혀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삼독심을 일으키고 그 삼독심으로 갖가지 악업을 짓는 ‘나’를 행복의 자리로 되돌리고자 함에 있습니다. 항상 욕심을 줄이고 적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알고 너그럽고 온화한 마음으로 성냄을 줄이고 이치를 깨달아 어리석지 않다면 어찌 나에게 독(毒)이 있다 하겠습니까? 사람은 태어날 때에는 주먹을 쥐고 죽을 때에는 손을 펴고 죽습니다. 왜냐하면 태어날 때에는 세상의 모든 것을 쥐려고 하고 죽을 때에는 빈손으로 가려하기 때문입니다.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의 삼독(三毒)을 버리면 우리는 행복한 인생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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