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혜숙 수필가

사람의 몸을 일그러뜨리고 비틀어 원통이나 삼각형 모양들로 그리기 시작한 화가들을 입체파라 일컫는다. 그 대표 선두에 선 화가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스페인 출신의 피카소다.

그의 눈빛은 내 쏘듯 검은 동공으로 무표정하게 정면을 응시하고 있거나 웃통을 벗은 채 화판에 그림 작업을 하는 모습으로 내겐 각인돼 있다.

그는 수많은 여인들과 염문을 뿌리며 인생을 파탄에 이르게 했으며, 아이러니하게 그 에너지로 살아생전 역동적인 창작 작업을 했다.

인간적으로 피카소를 존경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작품 속 예술세계의 피카소는 세기의 위대한 천재 예술가임에 틀림없다. 1세기에 한번 나올까 말까하는 그를 만나러 ‘소피아 미술관’으로 발걸음이 바빠졌다.

옛 카를로스 병원을 개조해 만든 ‘소피아 미술관’은 예술적인 기운이 넘쳐난다.

건물 가운데엔 중정이 자리 잡고 있으며, 긴 회랑을 따라 각각의 방엔 20세기 현대 작가들의 수많은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화가 L이 영인본을 보고도 눈물이 났다던 ‘게르니카’는 2층에 전시되어 있다.

한쪽 벽면을 다 차지할만한 크기의 짙은 회색빛의 그림은 현장을 방문한 관람객들의 눈을 압도시킨다.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알린 그 한 장의 극명한 그림이 온 유럽을 충격에 빠트렸고 바다건너 대륙들에게도 고발의 메시지를 정확히 전달했다.

지역간 감정이 심했던 스페인 내전은 오랫동안 극심한 갈등을 일으켰고 군부로 스페인을 장악한 독재자 프랑코는 히틀러와의 야합으로 무고한 북부 바스크인들의 게르니카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2차 세계 대전의 주범인 히틀러의 신무기들을 실은 공중 기들은 무차별 융단 폭격으로 게르니카 사람들을 살육했다. 프랑스 파리에서 이 참혹한 소식을 들은 피카소는 비탄과 울분에 빠져 단숨에 이 그림을 그렸다.

스페인 영토와도 바꿀 수 없다는 ‘게르니카’는 이제 어떤 숫자로도 가격을 대신할 수 없는 스페인의 상징이 되었다. 또한 영원히 국외 방출을 법으로 금지했기에 ‘소피아 미술관’에 와야만 진품의 게르니카를 만날 수 있다. 죽어 축 늘어진 아이를 안고 울부짖은 여인과 부러진 칼을 부여잡고 쓰러진 사내와 창이 입속에서 나오는 말과 소머리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고, 무자비한 폭력에 짓밟히고 내동댕이쳐진 사람들로 생지옥을 표현했다.

예전 제주도를 답사하며 만났던 제주 양민 학살 4·3사건을 마주하며 그들의 참상에 눈물지며 분노했던 영상이 묘하게 이 그림과 오버랩 된다.

‘파리 만국 박람회’에 출품한 이 한 장의 그림이 온 세상에 그들의 참상을 알리는데 어떤 매체보다도 폭발력이 컸다.

어느 시대이던지 무고한 양민들의 희생으로 이뤄진 정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피의 역사 속에 언제나 민초들은 영문도 모른 채 이용당하고 희생당했을 뿐이다.

‘국가는 국민이다’라는 말이 이들의 비극에서는 찾아 볼 수가 없다. 위정자들의 정치이념과 더러운 권력욕의 야비한 타협만 있을 뿐이다.

한 인간으로서 인격은 평가절하 될지라도 그가 남긴 예술적 파장과 천재성은 무시 할 수 없다.

내가 만난 피카소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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