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뀌면 새 달력이 벽에 걸어지고 으레 두툼한 새 노트 한권이 준비 된다. 노트한권이 귀하던 시대에 무엇을 적을 게 참 많았다. 스치는 길가의 풀잎을 보고도 새롭고 높은 하늘을 보면 떠도는 구름에 이름을 다 붙여가며 나름대로 시인 흉내를 내곤했다.

때론 안방 벽에도 노트가 됐고 방문 창호지에도 깨알처럼 무엇을 썼다. 그럴 적이면 벽에다 낙서를 했다고 어김없이 부모님께 꾸중을 들었다. 학창시절엔 기회가 많았지만 줄줄이 동생들을 많이 둔 덕에 어쩌다보니 제대로 무엇을 써보지 못했다.

제대로 일지에 기록을 하게 된 시기는 결혼 정령기가 돼서 였다. 신혼일기라는 제목을 노트 겉표지에 예쁘게 붙여 쓰기 시작했다. 어김없이 저녁이면 신랑은 일기장을 훔쳐보려고 애를 썼다. 방안어디에도 그 일기장을 감춰 둘 만한 곳이 없었다. 행여 마음을 들킬세라 꼭꼭 숨기느라 꽤나 힘들었다. 안전한 곳을 찾느라 부엌 찬장 속을 자주 들락거렸고 어느 날은 들킬 뻔해서 쌀 단지 안에까지 숨겨 놓기도 했다.

그렇게 성장한 일기장은 21년 동안의 깊은 역사를 갖고 있다. 1년에 한권씩 장롱 서랍장 한쪽에 보물처럼 쌓여있는 일기장은 이사를 여러 번 옮길 때마다 여간 소중히 다뤄지는 것이 아니다.
어느새 두 딸들이 자라 대학생이 되었다.

어린 날부터 줄 곳 지켜봐 온 아이들은 간혹 일기장을 보자고 조른다. 저희들이 어떤 기록을 찾으려면 몇 년도 걸릴 것을 봐달라고 한다. 중학생 사춘기 때 격은 일 고등학교 때 의 일등 낱낱이 기록돼있기 때문이다.

기뻤던 일 섭섭한 일등 일기장에는 그날그날의 특별한 일을 요약해서 적어 놓는다. 2004년 1월1일 해돋이를 맞이하면서 22권 째의 새 노트에 감회가 새롭다. 분신 같은 존재로 또 한권의 빈칸을 메꾸어 간다는 기쁨에 가슴 설레이기도 한다. 우리 집안의 역사가 고스란히 감춰져 있는 일기장은 재산 목록 1호 보물로 남겨져있다.

문학으로 승화 시킨 일기장은 여러 해 동안을 애지중지 가슴에 심겨졌고 든든한 지킴이 역할을 한다. 새로 맞은 갑신년 해에는 더욱 소중히 새롭게 탄생시키고 싶다. 

송재윤 / 내수문학회장·아동문학가 (sjy043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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