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솔 홍익불교대학 철학교수

인간은 아무리 비참한 상황에도 곧 익숙해지듯이 반대로 아무리 감격스러운 상황에도 익숙해진다. 비록 아름답고 사심이 없는 순수한 사랑에 마음이 이끌렸던 때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인간은 어느 날인가 그것을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아니 당초에는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던 행동조차도 언젠가는 불만을 품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란 필경 그런 동물이다. 흔히 여자들은 한 남자의 사랑을 받으며 결혼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라는 둥 바보스러운 말을 한다. 남자가 원래 한 사람의 여성을 전 인생에 바쳐 사랑할 만큼 성실하게는 만들어져 있지 않다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비록 백보양보해서 남자가 한 사람의 여성을 진정으로 사랑했다고 해도 여자는 반드시 그 사랑에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남자든 여자든 비록 아무리 깊은 사랑을 얻었다고 해도 그것으로 인해 구제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사랑을 함으로써 구제되는 것이다. 인간은 추악하다. 상대가 완전하지 않더라도 추악하더라도 더욱 더 그 삶을 사랑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구제될 수 있는가의 여부가 결정된다. 상대가 아름답다는 이유로 기울어진 사랑도 언젠가는 시들어버린다.

더구나 남자가 여자를 그러한 이유로 사랑했을 때는 말할 나위도 없다. 여자가 남자의 사랑을 받으면 그때부터 타락이 시작된다. 따라서 그녀가 아름답기 때문에 사랑했어도 사랑을 나누는 순간에 이미 여자의 타락이 시작되는 것이다.

즉, 여자의 결점이 있어도 더욱 더 그녀를 사랑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남자의 구원의 길이 있는 것이다. 상대의 아름다운 마음에 이끌리거나 육체적 매력에 감동해서 이끌린 사랑은 반드시 언젠가는 식어갈 것이다.

인간은 멋진 연인을 만남으로써 구제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이 사람이면 그 추악한 면도 함께 사랑할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비로소 구제 받는 것이다. 혹은 상대의 아름다움과 추함에 관계없이 사람은 사랑할 수 있도록 성장했을 때에 비로소 구제 받는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자신을 구제하는 이외에 방법은 없는 것이다. 어떠한 사랑도 자신을 구제할 수는 없다. 너무나도 아름답고 너무나도 관대하고 너무나도 깊은 사랑에 이르렀을 때 인간은 그 사랑에 의해 자신이 구제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을 구제하는 것은 타인의 사랑이 아니고 스스로의 능동적인 에너지이다. 부모의 사랑조차도 자식을 구제할 수는 없다. 그런데 하물며 에고이스틱한 남녀의 사랑이 사람을 구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은 타인에 의해 자기를 구하려고 하는 과오를 사랑에 있어서 종종 행하고 있다. 그것이 세상에 흔해 빠진 사랑의 종말이 아닐까. 혹은 결혼의 비극이 아닐까. 상대방의 사랑에 의해 스스로를 구하려고 하는 한 인간은 상대방이 약속시간에 1분만 늦어도 불만스럽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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