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솔 홍익불교대학 철학교수

옛 성현(聖賢)께서는 현실의 세계를 냉철히 보시고 말씀을 하셨을지라도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리다.

생각이야 지당한 말씀이지만 어찌 현실이 그러하랴! 마음이야 지당한 말씀이지만 어찌 생활이 그러하랴! 그러나 어떻게 알아야 할까? 오늘의 달콤함이 클수록 훗날의 슬픔도 크게 되고 오늘의 슬픔이 클수록 훗날의 기쁨도 클 것이니 기쁨도 고통이고 슬픔도 기쁨이다. 뉘라서 이 말씀을 옳다고 말을 하오리오 만은 오로지 옛 성현들께서 이 마음을 알고 있으리다. 그래서 미소 뒤에서 다가오는 슬픔을 보는 이가 드물고 슬픔 뒤에서 다가오는 기쁨을 보는 이가 드물다.

모름지기 달콤함은 동(動)과 어우러져 치우쳤으니 이는 중(中)을 잃었음이고 슬픔은 정(靜)과 어우러져 치우쳤으니 이 또한 중(中)을 잃었음이다.

마치 양끝에서 하늘 높이 치솟는 널뛰기 소녀와도 같다. 부드러움이 지나쳐서 괴롭히고 강직함이 지나쳐서 냉혹하다. 괴롭힘을 당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냉혹한 것도 고통스럽기야! 마찬가지가 아니던가?

또 오늘이 있었다고 내일은 없는 것이 아니고 오늘이 있었다고 내일도 있는 것이 아니며 오늘이 없었다고 내일이 없으리까? 있는 것도 그렇고 없는 것도 그렇고 모두가 마음에서 생겨나는 조화로다.

그래서 “이것이면 족(足)하지” 라고 하는 사람은 이미 족함에서 행복을 얻었고 “이것만 있었으면” 이라고 하는 사람은 이미 부족(不足)함에서 불행을 얻었으니 어찌하여 행복이 마음가운데에서 머물고 불행도 마음가운데에서 머물지 않겠으랴! 그래, 말씀이야 참으로 지당하다지만 어찌하여야 말씀대로 행(行)할 것이며 어찌하여야 내 마음을 내가 마음대로 행(行)할 것이랴! 어리석고 슬프도다 그리고 아프도다! 내 마음의 주인은 성현(聖賢)도 아니요 자연(自然)도 아니요 천지신명(天地神明)도 아닌 것을….

마음의 주인이 마음을 모른다 하고 마음의 주인이 마음 때문에 슬퍼하고 마음의 주인이 어렵다 말씀을 하실까? 말씀이 지당하다면 지당한 것은 마땅하고 마땅한 것에는 반드시 길이 있나니 행(行)하여서 정진(精進)을 하였던가? 문(門)에 걸린 자물통 하나를 여는 것도 어려울 진데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이야 하물며 성현(聖賢)의 말씀을 듣는 것이야!

가만히 앉아서 오는 손님을 맞이하려는가? 아니면 그렇게 흐르고 있는 운명(運命)을 바라다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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