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솔 홍익불교대학 철학교수

이 몸은 어디에서 왔으며 티끌 같은 이 육신은 어떻게 왔을까? 세월에 속아서 왔을까? 아니면 운명의 그림자 때문에 왔을까? 이렇게 홀로 왔다가 그렇게 홀로 떠나가는 운명은 무엇을 인연으로 삼아야 하는 걸까? 그대와 내가 어떤 인연에서 만났던지 그대와 내가 어떤 운명에서 살아가던지 나는 나만의 도(道)를 계속하면 그뿐이지 않겠는가! 그를 애타게 원하였던 마음도 그를 간절히 바라던 마음도 모두가 생각 하나를 달리하면 부질없는 내 마음이 아니던가? 그런데 속절없는 마음 때문에 티끌 같은 육신을 괴롭히고 부질없는 생각 때문에 속절없는 마음을 괴롭혀야 하겠는가? 하기야 속절없기로 어디 마음과 생각뿐이랴! 부질없이 찾아 헤매이던 그것들도 속절없기는 매 한가지요 부질없이 애태우던 그것들도 속절없기는 매 한가지가 아니던가? 그래서 조금은 부족하더라도 깨끗한 한 덩어리의 마음과 푸르른 한 떨기의 생각을 간직 할 수가 있다면야 무엇을 더 바라고 구할 것이 있겠는가?

내가 당신을 어떻게 알게 되었던가? 지나가는 잠깐의 바람을 만난 것처럼 슬그머니 다가와서 슬그머니 머물다가는 우리들의 그림자! 운명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까? 아니면 인연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까? 내가 그것을 모르고 당신도 그것을 모르면서 그렇게 정처 없는 구름을 따르고 있을 뿐이니. 서로가 모르는 그것들을 무엇으로 옳다고 말을 하고 무엇으로 그르다고 말을 하오리까?

설혹, 지금은 옳았다고 하더라도 천년(千年)의 세월을 어떻게 장담 할 수가 있으랴! 그러하니 물을 것도 없고 대답 할 것도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 하늘을 한번 바라다보고 구름을 한번 바라다보고 잎새가 푸른 산천을 한번 바라다보고 앞서간 임들의 영혼을 찬양하며 노래한다면야! 어찌 천년의 인연이 허송하다 이르고 사람의 마음이 허무하다 말을 하오리까? 이때에 마음이 작아진 물줄기를 따른다면 생각도 작아진 물줄기를 따르고 마음이 높은 곳으로 흐른다면 생각도 높은 곳으로 흐르며 마음을 넓은 곳에다 두게 되면 생각도 넓은 곳으로 흐르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마음에서도 이익을 좇지 않는 마음이 드문 까닭은 보통 사람의 마음이다. 이익이 보이면 모이라 하지 않아도 모여들고 쾌락을 보이면 모이라 하지 않아도 모여드는 것은 마음 중에서도 보통의 마음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익 때문에 죄를 일으키는 마음도 있으니 이를 사악(邪惡)한 마음이라 하고 반면에 이익과는 관계하지 않고 의리와 도덕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도 있으니 이를 선(善)한 마음이라고 한다. 의리와 도덕을 먼저 생각 할 수 있는 생각을 정념(正念)이라고 하고 정념이 마음과 교류하여 일으키는 마음을 정심(正心)이라고 하며 정심이 육신에 드러나면 정행(正行)이라고 하고 또 정심이 말 가운데에 드러나면 정언(正言)이라고 이름을 한다. 그래서 사람의 모습 중에서도 쉽게 보이는 것은 행실(行實)이고 쉽게 드러나는 것은 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정언(正言)과 정행(正行)은 지키기도 어렵고 정념(正念)과 정심(正心)을 간직하기가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정념과 정심을 더욱 소중히 하는 것이며 소중한 가운데에서 참다운 가치가 더욱 빛을 발휘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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