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력 초하루 날이 되면 산신에게 제를 올리던 시골할머니는 언제나 첫 새벽에 길어 온 찬 우물물로 정갈히 목욕재계를 하고, 참빗으로 한 올 흐트러짐이 없이 머리를 빗어 비녀로 단단히 틀어 올리시곤 했다.

늘 아끼던 독의 쌀도 듬뿍 퍼내 물에 불리고, 떡방아를 찧어 시루 본으로 솥과 시루를 고정시켜 백설기를 쪘다. 떡을 찌는 동안엔 여자아이들은 부엌 문지방을 넘을 수 없었다.

행여 떡에 부정이라도 끼어 설기라도 할까봐 할머니는 철저하게 불앞을 지켰다. 그리곤 며칠 전부터 손질해 놓은 흰 무명 한복을 입고, 어둠이 한참 내려 온 집 마당을 지나 뒷산 산신바위로 향했다. 바위 앞에서 할머니의 기도는 간절하고도 길었다. 집으로 돌아오실 땐 반드시 제법 큰 덩어리의 떡을 제를 지낸 바위 앞에 떼어 놓고 왔다. 먹을 것이 흔하지 않았던 시절이니 지나가는 산짐승이든 사람이든 먹으라는 배려였지만, 짓궂은 장난이 심했던 오라버니들이 그 떡을 가만 나둘 리가 없었다. 할머니 눈을 피해 다시 주워 온 것이다. 그 밤에 몇 주 전 이사 온 윗집 아이들이 개평 떡을 주우러 왔다가 애꿎게 산에다 두고 온 솥뚜껑만 찾아줬다. 다음날 할머니는 윗집 아이들에게 무척 미안해하며 떡을 나눠 줬다.

내 유년 기억 속 떡은 집안에 경사스러운 일이 있어도, 어쩌다 아이들이 탈이 나거나 하물며 뒷간에서 발을 헛디뎌 빠져도 액막이 떡을 해 이웃들과 두루 나누며 무탈하길 기원했다.

우리형제들의 한 학기 공부가 끝나는 날에도 어머니는 떡과 집에서 담근 막걸리로 초등학교 선생님들을 대접 하곤 했다.

계절에 따라서 떡에다 넣는 재료들도 참 많다.

봄에는 쑥을 넣어 떡을 만들어 겨우내 잃었던 입맛을 돌게 했고, 단오가 오기 전에는 어린 느티나무 잎을 넣어 느티떡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초여름에는 강낭콩을 잔뜩 넣은 조금은 격이 떨어지는 이름인 개떡을 만들어 들일을 하는 식구들에게 새참으로 가지고 나가기도 했다. 또한 가을에는 늙은 호박을 썰고 대추도 넣어 달콤한 호박떡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각 지역마다 나는 산물들을 이용한 떡들은 수 십 가지도 더 되고 서양 케이크에 자리를 많이 내어 줬지만 지금도 떡은 계속 진화하고 있다. 어쩌다 행사로 인해 집에서 해 먹던 떡은 이제 시장에 가면 언제든 손쉽게 사는 세상이다. 가래떡과 송편은 어린 날 손꼽아 기다리던 아련한 명절의 추억이 생각나 자주 사먹기도 한다.

남도지방의 벗에게서 택배로 받던 특별한 모시떡 또한 내가 나고 자란 고장서는 접해 보지 못하던 떡이라 새로 즐겨 찾게 된다.

미련한 사람이 떡을 찾는다는 옛말은 잘못된 말이다.

떡은 덕을 나누는 것이란다. 덕이 떡으로 변천된 과정이야 어찌됐던 간에 일면 영 지어낸 말만이 아니라는 솔깃한 설득력이 있다.

운동을 하러 들른 휘트니스 센터에서 직원은 느닷없이 백설기 한 덩어리를 내게 내민다. 자기도 모르는 손님이 기쁘게 얻은 늦둥이 백일이라며 선뜻 떡 한 박스를 놓고 갔단다.

이런 떡은 실 한 타래라도 주고 먹어야지 절대 공짜로 먹으면 안 된다는 내 너스레에 폭죽처럼 주위에서 웃음이 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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