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부터의 망언에 대하여 알아보자.
△51년 9월- 당시 요시다 시게루(吉田茂-‘창씨개명은 조선인이 원해서 했다’는 아소오 타로오의 조부)총리가 국회 연설 시 한·일 회담의 시작을 알리면서 한국인을 ‘뱃속의 벌레’로 비유했다. △53년 10월-한·일 회담 도중 일측 대표인 구보타가 ”일본이 36년 동안 한국을 통치한 것은 은혜를 베푼 것이다”라고 망언했다. 이후 4년 6개월간 회담 중지됨. △64년- 하시모토 관방장관이 “일본은 장형이고 한국은 말제(末弟:막내동생)라고 망언했다. △64년 12월-오노 부총재가 또다시 “한·일 관계는 부모자식 관계이다”라고 잠꼬대 같은 망언을 함. △65년-시나 외상이 ‘동화와 정치’라는 저서 속에서 ‘조선합병이 제국주의라 한다면 이는 영광스러운 일이다’라고 왜곡표현 함. △74년-타나카 카쿠에이 총리가 중의원 연설 중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한국인에 유익했다”고 망언함. △89년-타케시따 총리가 “침략전쟁 여부는 사가(史家)들이 평가할 몫이다”라고 망언 함. △94년-나가노 법무상이 “위안부는 공창(公娼)이었으며, 남경대학살은 날조됐다”라고 망언해 한국, 중국인들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94년-오쿠노는 “일본의 잔악 행위가 침략이라는 인식은 미국의 세뇌에 따른 결과이다”라고 책임을 미국에 전가하는 망언함. △95년-이미 망언 전문가 반열에 오른 오쿠노가 또다시 “안중근은 살인자이다”라고 망언을 하여 한국인들의 분노를 사고 말았다. △95년10월-한국을 방문중이던 에토 관방장관이 일본 언론과 인터뷰 도중 “한일 합방 시 한국에도 좋을 일을 했다”라고 망언, 분노를 샀다. 이후 한국의 강력한 반발로 망언에 대해 사과했으나 96년 1월6일 선거구에서는 또다시 ‘자신의 신념은 조금도 변함이 없다’라고 하여 사과 발언이 진심이 아니었음을 스스로 증명했다. △96년6월-자타가 인정하는 망언 전문가 오쿠노 세이스케 전 법무상이 또다시 ‘위안부는 상행위였다’고 망언을 함으로서 한·일간의 거리는 좁혀질 수 없는 불편한 이웃임을 또다시 입증했다.
이처럼 굵직굵직한 망언만을 늘어놓아도 지면이 부족할 정도다. 요 몇 년 잠잠하던 망언이 전 후 일본의 총리로서 첫 번째로 망언을 하여 평지풍파를 일으켰던 요시다 시게루 외손자인 아소 타로오(큐슈에 아소광업이 있었고 일제 때 많은 한국인 징용인들을 혹사했던 기업으로 악명 높음)가 올해도 외할아버지의 망령을 이어받아 망언을 하고 있으니 일본 정치가나 각료들의 망언은 끝이 없을 것 같다.
일본 내 사정이 어려울 때 관심을 밖으로 돌리려는 망언, 한국을 떠보려는 망언, 한국이 불행한 일로 어려워할 때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망언, 스포츠나 국제입찰에서 패배했을 경우에서 오는 근거 없는 일본인의 심정적 우월감이 무너질 때 망언이 나온다. 그 종류도 다양하니 거기에 맞춰 우리의 대응도 필요한 것이다. 물론 망언이 많아질수록 일본 우익들이 초조해진다는 얘기이고 우리가 일본을 완전히 극복할 때 이러한 망언은 눈 녹듯이 자취를 감출 것이다.
충청매일 CCD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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