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끝난지도 60여년이 다가오는데 아직도 잠꼬대하는 일본 정객이 많으니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일본이 미국에 패전하고 점령 시대를 보내던 50년대의 망언은 주로 ‘한국을 다시 침략하여 지배하고자 하는 발언’이 주를 이루었고, 60년대는 일본이 맏형이라는 논리가 70년대는 우리의 눈부신 발전을 시기하여 일본이 은혜를 베풀었다는 ‘은혜론’이 일었고, 80년대는 교과서 파동에 따른 변명과 발언이 주를 이루었고, 90년대는 회수도 많아지고 종합화되는 망언의 절정기였다. 이러한 못된 버릇은 신세기인 21세기도 넘어 2003년에도 줄기차게 이어지고 있으니 그 생명력은 가히 대단하다 하겠다.

과거부터의 망언에 대하여 알아보자.
△51년 9월- 당시 요시다 시게루(吉田茂-‘창씨개명은 조선인이 원해서 했다’는 아소오 타로오의 조부)총리가 국회 연설 시 한·일 회담의 시작을 알리면서 한국인을 ‘뱃속의 벌레’로 비유했다. △53년 10월-한·일 회담 도중 일측 대표인 구보타가 ”일본이 36년 동안 한국을 통치한 것은 은혜를 베푼 것이다”라고 망언했다. 이후 4년 6개월간 회담 중지됨. △64년- 하시모토 관방장관이 “일본은 장형이고 한국은 말제(末弟:막내동생)라고 망언했다. △64년 12월-오노 부총재가 또다시 “한·일 관계는 부모자식 관계이다”라고 잠꼬대 같은 망언을 함. △65년-시나 외상이 ‘동화와 정치’라는 저서 속에서 ‘조선합병이 제국주의라 한다면 이는 영광스러운 일이다’라고 왜곡표현 함. △74년-타나카 카쿠에이 총리가 중의원 연설 중 “일본의 식민지 지배는 한국인에 유익했다”고 망언함. △89년-타케시따 총리가 “침략전쟁 여부는 사가(史家)들이 평가할 몫이다”라고 망언 함. △94년-나가노 법무상이 “위안부는 공창(公娼)이었으며, 남경대학살은 날조됐다”라고 망언해 한국, 중국인들의 분노를 사게 되었다. △94년-오쿠노는 “일본의 잔악 행위가 침략이라는 인식은 미국의 세뇌에 따른 결과이다”라고 책임을 미국에 전가하는 망언함. △95년-이미 망언 전문가 반열에 오른 오쿠노가 또다시 “안중근은 살인자이다”라고 망언을 하여 한국인들의 분노를 사고 말았다. △95년10월-한국을 방문중이던 에토 관방장관이 일본 언론과 인터뷰 도중 “한일 합방 시 한국에도 좋을 일을 했다”라고 망언, 분노를 샀다. 이후 한국의 강력한 반발로 망언에 대해 사과했으나 96년 1월6일 선거구에서는 또다시 ‘자신의 신념은 조금도 변함이 없다’라고 하여 사과 발언이 진심이 아니었음을 스스로 증명했다. △96년6월-자타가 인정하는 망언 전문가 오쿠노 세이스케 전 법무상이 또다시 ‘위안부는 상행위였다’고 망언을 함으로서 한·일간의 거리는 좁혀질 수 없는 불편한 이웃임을 또다시 입증했다.

이처럼 굵직굵직한 망언만을 늘어놓아도 지면이 부족할 정도다. 요 몇 년 잠잠하던 망언이 전 후 일본의 총리로서 첫 번째로 망언을 하여 평지풍파를 일으켰던 요시다 시게루 외손자인 아소 타로오(큐슈에 아소광업이 있었고 일제 때 많은 한국인 징용인들을 혹사했던 기업으로 악명 높음)가 올해도 외할아버지의 망령을 이어받아 망언을 하고 있으니 일본 정치가나 각료들의 망언은 끝이 없을 것 같다.

일본 내 사정이 어려울 때 관심을 밖으로 돌리려는 망언, 한국을 떠보려는 망언, 한국이 불행한 일로 어려워할 때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망언, 스포츠나 국제입찰에서 패배했을 경우에서 오는 근거 없는 일본인의 심정적 우월감이 무너질 때 망언이 나온다. 그 종류도 다양하니 거기에 맞춰 우리의 대응도 필요한 것이다. 물론 망언이 많아질수록 일본 우익들이 초조해진다는 얘기이고 우리가 일본을 완전히 극복할 때 이러한 망언은 눈 녹듯이 자취를 감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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