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 손은 약손이다’하며 할머니가 아픈 곳을 손으로 문지르면 두통, 뱃병, 설사병 정도를 과거엔 모두 고칠 수 있었다. 특히 손자의 꾀병엔 초능력 할머니의 손이 특효약이었다. 물론 요즘엔 아이가 아프다고 할머니 손에 아이를 맡기는 부모도 없을 것이다. 아프면 병원부터 가고 약과 주사로 쉽게 해결하는 세상이 됐으니 말이다.
그런데 할머니가 치유의 초능력을 잃고 스스로 몸져 눕게 되면 그 ‘초능력 손’을 대신해 줄만한 사람이 가족 중에 누가 있으랴. 어린 아이를 놀이방 또는 어린이집에 낮에는 맡기고 직장 퇴근 후에 찾아오는 탁아 보육시설처럼 거동이 불편한 노인을 돌보아 드리는 곳, 즉 주간보호소가 있는가 하면 아예 입소해 지내는 양로원과 요앙원은 물론 치료와 케어(보호수발)를 동시에 받는 노인병원도 있다.
앞으로 노인 인구가 급증하면서 노인 질병과 관련된 케어문제가 커다란 사회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다행히도 필자의 주변에는 뜻있고 돈있는 분들이 많아 노인과 관련된 케어시설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이 있어 노인 문제를 함께 생각해 볼 기회가 많이 있었다.
그런데 공통적인 이들의 생각에는 그러한 시설들이 시골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시골에 땅을 가진 분들이었다. 그러니 시골에 있는 땅을 활용해서 노인 시설을 지어보고자 함은 마땅히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노인이 되면 시골에 살고 싶어할 것이고, 또한 지금의 노인들은 실제로 도회지 보다는 시골에서 농사지으면서 살아온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는 짐작을 하는 것이다.
선진국의 양로원에 있는 할머니들이 창문에 얼굴을 내밀고 누군가를 간절히도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리 경관이 좋고 내부 시설이 잘 갖추어진들 그들의 외로움을 달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없으면 정말 죽으러 가기 위해 마지막으로 거치는 공간 밖에 되진 않는다는 것을 할머니들의 표정을 통해 읽을 수 있었다.
노인 관련 시설을 하고자 하는 분들에게 환경과 관련된 입지 조건에 관한 몇가지 제언을 하고 싶다.
첫째, 노인이 될 수록 외로움을 많이 탄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지나다니는 사람 구경이라도 많이 할 수 있는 곳이라면 좋겠다. 즉 옛날 시골엔 이웃 사촌이 많아 늘 사람이 왕래하고 관심가져 주었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시내에 있으면서 여러 가지 편의시설에 접근하기 편리하다면 더욱 좋다.
둘째, 내가 살던 고향같은 느낌이 들어야 한다. 자신이 살던 집을 떠나 시설에 입소한다는 것은 인간이 새로운 환경에 다시 적응해햐 한다는 것이므로 그 자체가 불안요소인 것이다.
흔히 주변에서 보아왔던 물건은 물론 할머니들이 주로 사용했던 생활용구 및 낯익은 꽃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봉숭아, 채송화, 나팔꽃, 해바라기꽃은 물론,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등이 널려있고 봄나물이 널려있는 산책로 및 고추장, 간장, 된장 등의 장항아리가 있어 자신들의 손맛을 자랑삼아 회상할 수 있는 장독대도 갖추어져 있다면 금상첨화다.
셋째, 시설이 시내에 있건 시외에 있건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을 보살펴주는 인적 구성원이 가장 큰 환경이다. 환경이라고 하면 자연 환경만을 생각하는데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환경’이다.
다시말해 노인을 배려하고 노인의 심리를 이해할 줄 아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직원이라야 한다. 제시간에 밥먹이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씻겨주는 일보다도 따뜻하게 손 한번 잡아주는 것이 훨씬 인간다운 질 높은 케어인 것이다.
살구꽃이 지는 것을 보며 시설의 젊은 직원이 ‘벌써 벚꽃이 지네’ 했더니, 한 치매 할머니가 ‘그게 워디 벚꽃이여! 살구꽃이지’했다.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