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솔 홍익불교대학 철학교수

나와 남의 입장을 함께 생각을 하고 함께 나아가는 사람을 “지혜롭다”라고 하며, 나와 남을 함께 알아야 한다는 것과 생각을 하여야 한다는 것과 나아가야 하는 타당한 이치(理致)가 있을 때에 “지혜로움이 깊다”라고 표현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명산(名山)에서 홀로 광명을 밝히는 것도 지혜롭다고 말을 하고 세상에서 자신의 깨우침을 펼치는 것도 지혜롭다고 말을 하겠지만 어느 것도 지혜(智慧)가 깊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혜 속에서 이치를 깨닫고 섭리(攝理)에 따라 정진을 계속할 때에 “지혜롭기가 그지없다”라고 표현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온화한 것과 차가운 것의 이치를 함께 알고 함께 생각을 하며 함께 나아갈 때에 덕스럽다고 말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온화한 것과 차가운 것의 이치를 함게 알아야 한다는 것과 생각을 하여야 한다는 것과 나아가야 한다는 것에서 깨우침이 있었을 때에 덕(德)스러움이 “넓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한편 세상에 태어났을지라도 자신의 꿈과 희망을 좌절시키는 것은 치욕이요 시련 중에서도 가장 큰 내면의 시련이다. 많은 재물이 없고 높은 권력이 없으며 깊은 학식이 없다고 하는 것과 내 인생의 꿈을 접어야 한다는 것은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스스로의 좌절을 합리화 한다는 것은 치욕 중에서도 슬픔이 가장 많은 치욕이 된다.

물론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느 누구인들 시련이 없고 좌절이 없겠는가? 현실이 좌절을 강요하고 세상이 좌절을 요구하더라도 결코 물러설 수가 없는 꿈과 희망이 있다. 그래서 좌절 때문에 지혜로움을 버릴 수가 없고 덕스러움을 버릴 수가 없다. 다만, 하늘의 섭리처럼 넓고 위대한 대인(大人)의 모습을 희망의 별로 삼고 삶의 방향타로 여기면서 오늘의 고통이 크고 현실이 야속하더라도 그 길을 걸어가야만 한다.

그래서 이치가 머물고 섭리가 작용을 하며 좌절의 문턱에서 새로운 희망의 샘물을 보는 것이다. 지혜로운 자는 깊은 곳까지도 밝게 알고 덕(德)스러운 자는 넓은 곳까지도 밝게 비추기 때문에 깊고 넓다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마음에다가 바람을 담으면 마음은 바람이 되고 마음에다가 허공을 담으면 마음은 허공(虛空)이 될까? 그리고 허공에다가 마음을 줄 때에 마음은 허공에 있고 바람에다가 마음을 줄 때에 마음은 바람으로 머물고 있을까? 마음은 허공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건만 이렇게 텅 빈 하늘이 가슴에서 머물고 그렇게 쓸쓸한 바람이 가슴에서 소리를 할까? 그리고 내가 이것에다가 매였기에 이것으로 끌리어가고 내가 저것을 원하였기에 저것으로 끌리어 간다.

또 모두를 채워 둘 수가 없고 모두를 비워둘 수도 없다. 그래서 하나도 담을 수가 없고 모두를 잊을 수가 없다는 것일까? 참으로 묘(妙)하기도 하여라. 그래서 이치(理致) 공부도 지혜와 덕 쌓기도 어렵다 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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