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혜숙 수필가

예년보다 일찍 찾아 온 겨울 한파가 매섭게 코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날, 단단히 옷을 채비하고 집밖을 나선다. 으레 길을 나선다 해도 딱히 마음 둘 곳이 없는 날에는 시끄러운 도심을 벗어나 우암산 한자락을 편안하게 차지하고 찾는 이를 맞아주는 청주 국립박물관으로 향한다.

전시 유물이나 특별전이 있는 전시관에서 내 발걸음은 한동안 머물다 오곤 한다. 그도 저도 아니면 나지막하게 산세와 더불어 자연의 일부분처럼 있는 박물관 건물들 사이를 거닐다 오기도 한다. 어쩌다 그곳서 반가운 얼굴이라도 만나면 박물관 속 찻집에 들려 따뜻한 차를 나누며 이야기 삼매경에 빠지기도 한다. 그렇듯 박물관은 늘 넉넉한 품 같은 안식을 주는 곳이다.

청명관 전시실 안에서는 ‘까치내와 미호천, 그 삶의 여정’ 이라는 특별전을 하고 있다. 청주·청원 통합기념으로 기획된 전시회란다. 일제 강점기와 광복을 거치면서 하나였던 청주와 청원은 나눠졌다. 무심천과 미호천이 만나는 두물머리 부근을 우리 옛 조상들은 까치내 라고 이름 지었다.

지금도 철새들이 매년 찾는 곳이지만, 유독 이곳에 까치들이 많이 상주했었나 보다. 까치와 연관돼 이름 지어진 지명들은 우리나라 곳곳에 많다. 그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길조이기도 하다. 이 길한 곳을 사람들은 늘 계절과 상관없이 찾아가 한동안 동심의 마음으로 머물다 오기도 한다. 특히 여름철에는 물놀이겸 물고기들을 잡으며 천렵을 해 사람들이 사랑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 까치내를 따라 비옥한 농토를 일구며 삶의 치열함은 이어지고 있으니, 미호 평야는 청주청원의 비옥한 곡창지대다. 소로리에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가 발견되기도 했으니 선사시대부터 사람살기 좋은 곳이었음에 틀림없다.

전시장 안에는 지금은 잊혀 진 풍경이지만 청주에서는 가장 크게 섰던 우시장 사진이 아득한 기억을 일으키며 그 시절로 데려 간다. 수많은 소와 사람들로 가득 찬 광경 속 사진 속에는 흰 두루마기와 중절모로 한껏 멋을 낸 내 아버지와 할아버지 중개인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식구나 다름없던 누렁소를 장에 팔러 가는 날이면 아버지는 이른 새벽부터 소가 좋아하던 재료를 아낌없이 넣은 쇠죽을 배불리 먹이고, 한동안 말없이 소의 머리와 등을 쓰다듬었다. 그리곤 여명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길을 나서 소와 함께 느린 걸음으로 도착한 곳이 무심천변의 우시장이다. 나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 사진 앞에서 한참을 머문다.

장날은 사람, 마을, 지역간 소통의 장소이기도 하다. 지금처럼 손안에서 세상의 모든 정보가 실시간 검색 되는 최첨단의 시절이 아니지만, 사람 사는 냄새가 나던 곳이다.

소읍의 버스 정류장서 차 시간을 기다리던 순박한 내 형제 친척 같은 사람들의 모습과, 청주 시내를 가로질러 지나가던 기차선로, 육거리 시장 지하로 묻힌 남석교를 건너가는 사람들 모습들도 한결같이 다 아련하고 정겨운 풍경들이다.

지나간 것들은 다 그립고 애틋한 것이 사람의 정이다. 무심천과 까치내가 흐르고 흘러 어느 날 금강으로 가듯, 우리네 삶의 여정 또한 그런 물줄기를 이루며 이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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