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고를 비관한 삼십대의 주부가 자녀 3명과 함께 아파트에서 뛰어내려 숨졌다. 아파트 14층에서 일곱 살, 세 살 난 두 딸을 먼저 밀어 떨어뜨린 후 다섯 살 난 아들을 껴안은 채 투신한 이번 사건에 대한 시각의 차이가 다양하다.
사회 안전망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현실에서 부모 없이 살 바에야 차라리 함께 죽는 게 낫다는 생각에서 일어난 동반자살을 단순히 개인의 문제만으로 돌릴 수는 없다는 동정론과 자녀의 의사와 관계없는 동반 자살은 자녀를 하나의 인격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소유물로 생각하는 부모의 잘못된 생각에서 빚어진 살인행위라는 질타론으로 전국이 뜨거웠다.
그러나 자녀들까지 함께 죽음으로 몰고 간 빗나간 모정은 어떤 이유로도 이해하거나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자식을 소유물로 여겨서야

자식을 개별적 주체로 인식하지 않고 부모의 소유물쯤으로 생각하는 위험한 정서가 극단적인 동반자살로 이어진 것이고 명백한 살인에 대한 죄의식이 없이 오히려 살인을 구원이라 생각했을 죽은 아이들의 어머니를 생각하면 그 무모한 사랑이 끔찍하기만 하다.

일전에도 부인의 카드 빚 5천만원 때문에 고민하던 30대 가장이 채권추심회사의 독촉전화를 받은 뒤 두 딸을 살해한 뒤 자살을 기도했다가 중태에 빠진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러한 자녀동반자살은 자신이 없는 세상에서 고통스럽게 살도록 방치하는 죄의식을 없애기 위해 일어나기도 하지만 경제적 정신적으로 자신을 힘들게 만든 배우자 등에 대한 복수심으로 저지르는 사례도 있다니 어느 경우든 자식을 자신이 마음대로 해도 좋을 자기 신체의 일부쯤으로 가볍게 여기는 정서가 개탄스럽다.

부처님께서는 육방예경(六方禮經)에서 “자식을 타일러 나쁜 일을 못하게 하고. 좋은 일을 가르쳐주며, 사랑이 그 골수에 사무치도록 하라”고 참다운 부모의 도리를 말씀하셨다.
굳이 성현의 말씀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자식이 잘못되기를 원하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기를 바라지 않는 간절한 애정 때문에 자식을 죽이는 극단적인 일까지 일어난다면 그것을 어떻게 사랑이라 변명할 수 있겠는가. 부모가 되기 전에 부모자격증이 있는지 자신을 냉정히 점검해야한다는 말이 있지만 이미 부모 된 자라도 진지하게 부모의 자격이 있는가 반성하고 한번 더 돌아다보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부모의 몸을 빌어 세상에 나왔으나 자녀는 생명을 부여받는 순간부터 철저히 독립된 인격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부모의 자녀에 대한 친권도 자녀가 성인이 되기까지 보호하는 의무로서의 성격인 것이지 결코 부모가 자녀의 권리를 소유하는 권리의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가족관은 자식을 자신의 또 다른 분신이라 여겨 소유물처럼 생각하는 보편적인 정서가 있다. 그래서 극단적 상황에 몰렸을 때는 물론 일상적인 일조차도 자신의 처지와 자녀의 상황을 동일시하여 자녀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결정을 부모의 임의대로 처리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동반자살 모성애 용납 안 돼

성 어거스틴의 어머니인 모니카와 네로 황제의 어머니 아그리피나는 로마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어머니 상이다. 자식을 위해 적극적인 행동을 실천했던 아그리피나는 남편 클라우디오 황제를 암살시키고 자신의 아들인 네로를 황제로 즉위시켰으나 결국은 그 아들에게 살해당했다.

반면 아들이 극도로 방탕과 방종의 생활 속에 빠져있을 때 그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며 자식을 지켜볼 뿐이었던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자식을 성 어거스틴이 되게 했다고 한다. 아이가 고통스러워하거나 내켜하지 않는 일도 부모의 잣대로 보아 만족스러우면 훌륭한 부모로서의 소임을 다한 것이라는 독선이 과연 자식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게 하는 일화다.

애들만 두고 갈 수 없어서 죽음의 길까지 동반한 어머니는 분명 지극한 모성애로 동반자살을 감행했겠지만 아이들의 입장에서는 억울한 죽음이며 어머니의 행동은 잔혹한 살인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생각할 수는 없었는지 헛된 죽음이 안타깝기만 하다.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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