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학 공부를 하면서 느끼는 게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성격이고, 두 번째는 본질이다. 역학을 배웠다고 하면 신통력을 시험해 보려고 드는 사람이 많다. 언제 집이 팔리고, 언제 취직을 하느냐고 묻기 일쑤다. 그것을 알지 못하면 실력이 없다고 무시해 버린다.

물론 역학은 길흉화복을 맞추기 위해서 존재하는 면도 없지는 않지만, 그게 목적은 아니다. 성격을 알면 행동이 보이고, 행동을 관찰하면 운명도 예측할 수 있을 뿐이다. 실례로 여기 한 그루의 나무가 있다고 치자.

그 나무가 봄을 맞으면 생기가 돈다. 여름이 오면 무럭무럭 자란다. 그렇지만 가을이 되면 낙엽이 진다. 겨울이 되면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만 남기고 모든 것을 버린다. 이것은 어떤 나무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런데 이 가지의 저 잎이 언제 지느냐고 묻는다면 맞출 수가 없다. 역학의 원리를 잘못 알고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지금까지 설명한게 성격이라면 성격만큼 중요한게 본질이다. 성격이 교육을 통해 고칠 수 있는 것이라면, 본질은 후천적으론 도저히 교정이 안 되는 특성이 있다.

본질이 왜 중요하냐 하면 변하지 않는 성질 때문이다. 불은 위로 타오르는 특성이 있고, 물은 얕은 데로 흐르려고 하는 기질이 있다. 쇠는 나무를 보면 자르고 싶은 개혁성이 있고, 나무는 곧게 자라고 싶은 곡직성이 있다.

이런 본질은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든 목(木)·화(火)·토(土)·금(金)·수(水)의 분류를 벗어날 수가 없고, 평생 이 기질대로 살다가 죽는다. 문제는 현대인들은 이런 특징을 감추려고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본질을 노출할수록 손해를 보기 때문이다.

정의감이 강한 금(金)인 이라고 해도 처음 만난 사람에게 따지고 들 수는 없다. 그런 식으로 살다가 보면 평생 싸움만 할 수밖에 없다. 이것을 표준화라고 한다. 자신의 본질을 감추고 사회에 적응하려는 노력이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그 본질은 나타나고 만다.

그래서 수(水)인은 화(火)인과 결혼하면 불행해질 수 있고, 목(木)인이 금(金)인과 동업하면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다. 이런 역학이론으로 정치를 관찰하면 신통하게 잘 맞는다. 민생은 외면한 채 정쟁에만 몰두하는 야당은 금인 기질을 닮았다. 학생 시절부터 운동권으로 활동하다가 정계에 입문한 야당인사들은 투쟁하는 버릇을 고치지 못한다.

사사건건 따지고 투쟁하는 정치를 하다가 보니 민생을 외면한다는 원성을 듣는 것이다. 여당도 마찬가지다. 세상이 바뀌었으니 아무리 여당이라도 특권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아직도 여당은 정보수사기관을 이용하고 싶은 유혹을 버리지 못하니 욕망을 주체하지 못하는 불과 비슷하다. 여야는 불과 쇠가 싸우는 격이니 죽어나는 것은 서민뿐이다.

아무리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고 해도 현실에 적응하려는 노력은 해야 한다. 문제는 그런 노력은 스스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끝없이 지속하고 있는 정쟁을 중단하기 위해서는 유권자들이 나서는 수밖에 없다. 실체도 없는 새 정치 바람이 거세지자 민주당이 민생을 찾아 나서는 것도 다 민심 때문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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