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면 총을 겨누고 “누구냐”고 신분을 묻는 ‘직결문화’가 발달했다면, 한국인들은 제삼자가 둘 사이를 소개하는 절차를 거쳐야 일이 풀리는 중개문화에 익숙해져 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직접 찾아가 문제를 풀기보다는 제 삼자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중재문화(仲裁文化)가 발달됐다.
싸움판에 뛰어들기 전에 “말리지마” 하고 침을 한번 뱉고 시작한다. 이 것은 적당한 시점에 끼어 들어 싸움을 말려주기를 바라는 중재의 의미가 내포돼 있다.

종교에서도 중재의미가 내포돼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문화권은 나와 신(神)과 직결돼 있는 반면 우리 나라 사람들은 고목·바위 등 중간 매개체가 항상 존재해왔다. 물건을 팔 때도 서양은 중개요인 없이 직접 흥정을 하지만, 우리 나라 사람들은 땅을 사고 팔 때도 부동산중개소를 거치기 마련이듯이 중개문화와 중개의식이 대단히 발달된 나라라고 할 수 있다. 하물며 노사관계를 중재하는 기관인 노사정위원회를 두고 있을 정도다.
나이 많고 향촌(鄕村)을 다스리게 하는 당(唐)·송(宋)대의 촌노인(村老人)제도가 있었고 중국의 전통적 정치문화는 오랜 경험을 쌓아 사리에 밝은 사람이 정치를 하는 노공정치(老功政治)가 있었다. 우리 나라 역시 훈장과 촌장 등이 그 역할을 대신해왔다.
노(老)는 늙는다는 말뿐만 아니라 식견이 높고 체험이 많다는 말이다. 백전노장(百戰老將)은 군사에 노련한 장수요, 노 선생은 늙은 선생이 아니라 식견이 높은 사람으로 불린다. 이들의 역할은 법 이전에 가장 초보적인 지방자치라 할 수 있는 그 지방의 억울한 민원(民怨)을 해소해주고 크고 작은 대소사를 덕망과 식견을 통해 결정하는 일이었다. 이처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이 사는 곳에는 반드시 분쟁이 일어나기 마련이어서 어른의 역할이 컸고 안방 아룻 목에 앉자 있기만 해도 저절로 권위가 서고 문제가 풀리는 시대가 분명해 존재했었다.
22년간 방영됐던‘전원일기’에서 양촌리 김회장’역을 맡았던 최불암씨는 그늘 넓은 느티나무 같은 아버지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명절이면 온 동네 사람들 세배를 받고, 먼길을 돌아 고단한 심신으로 고향을 찾은 마을 청년에게 한쪽 어깨를 내어주고, 크고 작은 일에 용기와 지혜를 빌려주던 어른의 모습을 드라마에서라도 지켜내길 원했다고 고백했다. ‘어른’의 자리를 지키고 싶은 건 소외감 때문이 아니라 젊은 세대의 미래를 어른들인 우리가 걱정하는 그런 모습으로 남길 원했기 때문이다.
최씨는 지금 세계에선 한국문화 열풍이 분 다는데 역으로 우리사회에는 한국적 정체성과 고유의 정신문화를 찾을 수 없고 자극적이고 비틀린 인간관계만 넘쳐날 뿐 우리네 가족의 의미와 훈훈한 인간애를 느낄 수가 없다고 한탄했다.
최근 고건 서울시장과 이세중 전 변호사회장, 김재순 전국회의장 등 16명의 명망가들이 매일 오전10시 서울 동숭동 모 카페에 모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다양한 주제를 정해 놓고 허심탄하게 토론을 즐기는 ‘동숭포럼’을 연다는 보도를 접하고 원로들의 역할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하고 부러움을 주고 있다.
청주에서도 공직과 교육계 등 각계에서 수십년간 활동하다 은퇴한 인사들이 매일같이 모이고는 있으나 그들만의 친목을 나누고 있을 뿐이지 아쉽게도 대부분이 청주를 사랑하고 걱정하는 일에 적극 나서는 모임은 아닌 듯 싶다.
도내는 물론이고 청주에는 어른은 있어도 진정으로 존경하고 따를만한 ‘어른다운 어른’이 없다는 말을 한다. 지역의 크고 작은 일에 나서서 개인적인 입신이나 이권개입과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자칭 ‘지역의 어른’은 많지만 잘잘못을 가르치고 훈계할 그런 어른은 아쉽게도 없다는 것이다.
전라북도 전주를 예향의 도시라 하고 충북은 청풍명월의 고장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교육도시라고 불려오고 있는 청주는 도대체 교육도시는커녕 문화도시도 아니요, 항공도시도 아닌 어정쩡한 도시로 전락하고 있다. 딱히 청주를 무슨 도시로 불러야 하는지 도시의 정체성마저 상실해 가고 있는데도 이를 바로 잡는데 앞장서는 어른이 없다.

맑고 깨끗한 청주(淸州)의 이미지는 커녕 청주의 관문인 가경지역 일대는 술집과 여관의 네온사인이 버팀목처럼 버티고 서있고 조직폭력배 수가 전국에서 가장 많고, 재래시장의 상인들은 죽거나 말거나 대기업과 외국계의 대형마트가 속속 들어서는 등 쇼핑천국으로 바뀌고 있는데도 이를 걱정하고 나무라는 어른이 없다. 지역에 큰 문제와 사건이 발생해도 걱정하고 중재는커녕 외면한 채 묵묵부답으로 일관해 이제 어른이라는 존재는 인터넷상에서나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닌지…
청소년들에게 도덕과 윤리를 가르치고 지역의 문제를 중재할 정도로 지역의 사표(師表)가 될만한 어른이 ‘건포도처럼 말라’ 있다는 점에서 어른이 그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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