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은 음력 8월 15일을 일컫는 말로써, 이날은 설, 단오와 더불어 우리 나라 3대 명절의 하나이다. 추석이 되면 무더위도 물러가고 서늘한 바람이 아침 저녁으로 분다. 넓은 들판에는 오곡이 무르익어 황금 물결을 이루며, 온갖 과일들이 단맛을 겨루며 풍성해진다.

추석은 ‘한가위’라고도 부르는데, ‘한’이란 말은 “크다”는 뜻이고, ‘가위’라는 말은 ‘가운데’라는 의미를 가진 옛말로, ‘한가위’는 8월의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가위’라는 말은 신라 때 길쌈놀이인 ‘가배’에서 유래한 것으로써, ‘길쌈’은 실을 짜는 일을 일컫는다.

신라 유리왕 때 ‘한가위’ 한 달 전에 베짜는 여자들이 궁궐에 모여 두 편으로 나뉘어, 한 달 동안 베를 짜서, 한 달 뒤인 ‘한가윗날’ 그동안 베를 짠 양을 가지고, 진 편이 이긴 편에게 잔치와 춤으로 갚은 것에서 ‘가배’라는 말이 나왔는데, 후에 ‘가위’라는 말로 변하였다. 그리고 추석의 어원은 ‘예기’의 ‘조춘일 추석월’에서 유래한 것이다.

또한 중추절이라는 것도 가을을 조추, 중추 및 종추의 3달로 나누었을 때, 음력 8월이 그 중간에 들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추석은 대표적인 우리의 만월 명절이다. 고려 시대의 노래인 ‘동동’에도 추석을 ‘가배’라 기록했음을 보아서, 이 명칭이 고려 시대까지 지속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가윗날’이 신라 이후 나라의 풍속으로 지속되었음은 중국의 ‘수서’에도 나타나 있거니와, ‘구당서’ ‘동이전’에도 신라국에서는 8월 15일을 중히 여겨 음악을 베풀고 잔치를 열었으며, 신하들이 활쏘기 대회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추석이 가까워지면 농사일도 거의 끝나고, 햇곡식을 먹을 수 있으니, 사람의 마음도 넉넉해질 수 있다. 과일도 풍성하게 나오고, 날씨도 그다지 더웁지 않고 춥지도 않기 때문에, 명절을 즐기기에는 아주 좋은 것이다. 추석날에는 일년 동안 거두어들인 햇곡식과 햇과일로 조상들에게 차례를 지내고, 이웃들과 서로 나누어 먹으며, 즐겁게 하루를 지냈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떡을 빚어 나누어 먹었다고 해서, 속담 중에는 ‘일년 열두달 365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추석은 아주 오래 전부터 우리 조상 대대로 지켜온 우리 민족의 큰 명절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추석은 민족 전통의 명절이 아니다.

개인과 가족의 이기적인 추석이 되고 있다. 추석이 민족문화의 공동체적 가치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다. 내가 어렸을 적만 하여도 추석은 즐겁고 평화로우며 행복하였다.

추석은 잔칫날이었다. 차례를 지내고 나면, 성묘를 가고, 성묘가 끝난 다음에는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어른들은 어른들끼리, 혹은 동네 사람들이 함께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두 패로 나뉘어 줄다리기를 하였는가 하면, 남해안 일대에서는 ‘강강술래’ 놀이를 즐기기도 하였다.

그리고 민간 신앙적 행사도 적지 않았었다. 밭둑에다 음식을 차려 놓고 토지신을 위하는 행사도 있었으며, 이것은 풍년과 건강을 위하는 일이었다. 특히 추석날에는 조왕을 위하여 정화수를 갈아 주었다. 인간의 행복과 건강을 위하는 일이었다.

추석날이 되면, 집집마다 어른들을 찾아 인사를 올리고, 송편이며, 떡이며, 햅쌀밥이며, 햇과일들이며를 실컷 먹었다. 그때의 우리들은 행복하였다. 모든 것을 주고 싶고, 베풀고 싶고, 나누어 갖고 싶었다.

가난과 부가 따로 없었으며, 삶은 짐이 아니었다. 그것은 축복이었다. 그러므로 삶이 명절이었고, 명절이 곧 삶이었다. 명절이 있기에 삶의 고단함과 질곡을 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추석은 그런 모습이 아니다.

이번 추석에는 약 2천만 명의 인구가 고향을 찾아 이동하리라 한다. 그런데, 얼마 전에 있었던 수해와 태풍 ‘루사’로 인한 피해 때문에 그중 약 50 %만 고향을 찾을 것이라는 소문이 있다.

어쨋거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찾는다는 것은 우리 민족의 절반이 고향을 잃고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제 고향은 명절 때만 존재하는 부재의 공간이다. 고향은 물질적 사물이 아니며, 추석이나 설 때만 존재하는 의식공간에 불과하다. 따라서 고향은 추석이라는 언어에 의하여 드러나는 존재자이다.

아무도 물질적 고향을 이제 가질 수 없다. 이와 같은 고향의 상실은 현대인의 보편적 원리가 되고 있다. 사실 고향은 물질로 가득찬 인간의 상상력이었다. 그러므로 고향은 인간 그 자체요, 꿈이요, 삶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태풍과 수마에 할퀸 불행한 이웃이, 아니 고향이, 오히려 고향을 잃고 있다.

16 개 시, 도, 203 개 시, 군, 구의 1917 개 읍, 면, 동이 특별 재해구역으로 선포되었다. 재앙에 의한 피해는 7조7천억 원을 넘는다. 지금 우리 이웃의 많은 사람들이 이 엄청난 불행과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그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고, 추석의 기쁨을 함께 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고향을 지킨 사람들이었기에 오히려 고향을 잃었다. 우리들의 고향이 영원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고향을 지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함께 송편을 빚고, 햇곡식, 햇과일로 그들과 함께 추석을 지낼 수 있도록 해야 하는 일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영혼인 추석과 고향을, 민족공동체의 문화로 다시 살아남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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