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파괴는 인간 파괴다

인간은 손에 의한 두뇌의 발달로 높은 의식을 창조할 수 있었으며, 의식의 발달이 과학문명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러나 과학은 인간의 환경인 자연을 목적으로 보지 않고, 수단과 정복의 대상으로 봄으로써, 오히려 인간의 고향인 자연을 약탈하고 파괴한다. 이것이 현대과학문명이 처하고 있는 딜레마다.

인간은 인간을 이루고 있는 환경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인간을 가능하게 하는 자연을 파괴하고 정복하는 것은, 인간을 파괴하고 정복하는 일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인간의 환경인 원시림이 인간에 의하여 급격히 사라지고 있다. 10~20 년 이내에 전세계원시림의 40 %가 사라질 위험에 놓여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산림파괴는 인간이 필요로 하는 깨끗한 공기와 산소의 양을 감소시킴으로써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는 것이다. 산림은 물과 공기를 창조하고 보존하는 공간이다.

1997년 세계의 담수에 대한 UN의 평가에 따르면, 세계인구의 약 1/3 이, 이른바 ‘물스트레스’로 알려진 조건, 즉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물을 제대로 공급해 주지 못하는 국가에 살고 있다.

2050 년에 이르면, 일정 정도의 물 공급이 필요한 경제 성장과 인구 증가로 인하여 세계 인구의 2/3가 이러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라 한다. 우리 나라도 ‘미래의 물부족국가’로 알려져 있다.

‘물스트레스’는 전형적으로 농업용수 부족과 같은 형태로 표출되며, 이것은 식량의 해결과 국가경제에 치명적 영향을 준다. 산림파괴에 의하여, 나무뿌리의 토양 보유능력과 홍수림에 의한 홍수방지 효과 등의 상실을 초래함으로써, 환경을 거칠게 바꾸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화석연로의 사용에 따른 지구온난화에 의하여 지구의 평균 해수면이 지난 세기에 10~20 ㎝ 상승하였는데, 이것은 지구의 기상변화를 가져오고, 인간에게 재앙을 가져다 준다. 그러나 산림은 연소의 산물인 이산화탄소를 사용함으로써 지구온난화를 막는 존재다.

산림의 파괴는 생물종의 다양성을 파괴하며, 생물종의 다양성이 파괴될 때 인간도 파괴될 것이다. 1998 년 인도에서 238 명의 목숨을 앗아간 산사태와, 중국에서 3천명의 사망자와 200억 달러의 피해를 발생시킨 홍수는 모두 산림남벌에 따른 파괴 때문인 것으로 지적되었다.

또한 산림 벌목으로 나무가 없어지면, 새와 짐승들의 서식처가 파괴되고, 그렇게 되면 새와 짐승들이 나무의 씨를 옮겨 주지 못하게 된다. 그리하여 나무의 번식과 연장이 불가능하게 된다. 또한 나무가 없으면 동물과 미생물들이 생존할 수 없다.

1979 년에, 지구의 허파로 불리우는 열대우림은 선사시대에 비하여 56 %로 감소하였다. 세계의 여러 나라들은 저마다 물질과 문화, 그리고 생물이라는 세 가지 유형의 자산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생물종의 다양성은 식량, 의약, 기호품의 형태로 개발될 수 있는 엄청난 물질적 부의 잠재적 자원이다. 그리고 한 나라의 생물종의 다양성은, 그 나라의 역사와 유산, 즉 그 시간과 공간에 집중된 수백만 년에 걸친 진화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것은 언어와 문화의 특수성 이상으로 귀중한 것이다.

친환경적인 여건의 조성은, 특히 열악한 도시환경의 공간적 배열에 중요하다. 1인당 녹지면적이 적어도 300 ㎡ 이상이 되어야 친환경적이라 할 수 있다. 원래 인간은 자연 속에서 살았으나, 현재의 인간은 자연을 벗어나고 있다. 콩크리트와 아스팔트, 혹은 모래와 공해가 환경을 이루고 있다.

2002 년 세계경제포럼이 발표한 환경지속성 평가에서 우리 나라가 142 개국 중 136 위를 했다는 것은, 우리 나라의 생존환경이 얼마나 나쁜 가를 잘 말해 주고 있다. 환경을 복원하는 일은, 나무를 심는 것이다. 나무가 인간을 살아남을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나무와 풀이 자랄수 없는 곳은 인간도 자랄 수 없다.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혹은 핀란드에 가보면, 산림이 울창한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이 그 나라의 국부이다. 그리고 나무를 벤 다음에는 꼭 경제적 가치가 있는 나무를 심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산림은 거의 잡목에 불과하다. 계획적인 조림을 볼 수 없다. 전국토 70 %의 산을 쓸모없이 놀리고 있다.

청주시로 들어오는 길목의 ‘양버즘나무터널’을 자랑으로 삼을 때가 아니다. 세계 여러 나라에 가도 ‘양버즘나무’로 가로수를 한 곳은 없다. 그 나무는 좋은 나무가 아니다. 속리산이나 월악산, 또는 우암산에 있는 나무들도 거의 잡목에 불과하다.

하루 빨리 계획조림이 필요하다. 이팝나무, 은행나무, 옻나무, 황칠나무, 잣나무, 소나무, 복자기, 피나무, 엄나무, 참나무, 노각나무 등 우리 나라 자생종으로써 훌륭한 나무들이 얼마나 많은가. 중국 북경은, 면적의 20 %를 나무로 조경하고 있다. 북경시내의 가로수나 나무들은 주로, 은행나무, 모감주나무, 회화나무, 수양버들, 버드나무, 소나무 및 백송들이다.

청주시의 친환경적 녹지면적을 위해서는 적어도 6천만 평의 땅이 필요하다. 그곳에 나무와 풀이 있어야 한다. 영구적인 자연과 환경윤리는 인간이라는 종의 건강과 자유뿐만 아니라, 인간정신이 태어난 세계로의 통로를 보존하는 데 그 목표를 두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 사냥꾼들은 어떤 종도 도와주지 않는다”는 보편적 진실의 불명예를 씻고, 자연과 함께 살아야 한다.

/ 충북대 교수·시인·이학박사

SNS 기사보내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충청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