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혜숙 수필가

11월에 폭설이 내리기는 몇 십 년만의 처음이라고 한다. 가을의 끝자락에서 단풍의 고운 빛도 제대로 다 보지 못하고 흰 눈 속에 가을은 파 묻혔다. 폭설의 첫눈과 함께 온 강추위는 근 일주일을 몸과 마음을 움츠리게 만들고 따뜻한 곳을 찾게 한다.

지금 도심 속 실내 커피숍이나 대형 쇼핑몰 내부는 계절과 상관없이 언제나 봄날 같으니 추운 바깥 날씨가 무색하다. 내 기억 속 늦가을 날 풍경은 우리 집이나 이웃집이나 대부분 비슷했던 것 같다. 텃밭에서 자라던 배추와 무가 겨울 내내 일용할 양식으로 김장이 돼서 뒤꼍 움 집속 독에 파묻혔고, 아버지는 녹슨 난로를 다시 꺼내 기름칠을 해 겨울날 채비를 했다.

칠, 팔 십년 대 학교의 난방은 화목과 석탄 난로 위주였다. 우리는 등교할 때 집에서 장작을 가져가기도 했고, 방과 후 학교 뒷산에서 솔방울을 줍기도 했다. 그 뒤로 조개탄을 때는 난로가 교실 한 가운데 놓이기도 했다.

겨울 아침 일찍부터 선생님은 교실난로에 불을 지피느라 매캐한 연기 속에서 눈물 바람을 하셨다. 고학년이 돼서는 의젓한 몇몇 사내아이들이 갓 부임한 여선생님을 대신해 난로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

불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은 팔에 완장을 찬 것처럼 교실 안 권력이기도 했다. 둘째 수업시간이 끝나면 자동으로 우리들의 도시락은 난로 위에 올려져 따뜻하게 데워지기를 기다렸다. 위아래 도시락들을 골고루 바꿔 따뜻하게 덥히던 선생님의 손길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따뜻한 도시락이 언제나 추운 겨울 속 든든하게 우리들 속을 채워 주었다.

난로 연통 근처를 지나가다가 새로 산 점퍼를 태워 먹기도 했고, 무심코 언 발을 난로 가까이에 가져갔다가 나일론 양말에 구멍을 내기도 했다.

집안 난로 위에는 늘 큰 주전자에 보리차가 끓거나, 물을 가득 담은 양은솥이 김을 내 뿜어 집안의 습도 조절뿐아니라, 식구들에게 씻을 물을 제공했다. 그 난로 주위엔 형제들의 운동화나 교복이 세탁돼 말려 지기도 했다. 저녁때가 되면 난로 주변으로 귀가한 식구들이 모여그날 하루 밖에서 있었던 일들을 꺼내 놓는 이야기 장소이기도 했다. 세상에서 상처 받고 온 꽁꽁 언 마음과 손발이 난로 주위에서 자연 치유되는 시간이었다. 내 기억 속 난로는 이렇듯 따뜻한 부모님 품 같은 것이다.

아파트가 도심을 차지하고 있는 편리한 생활에 난방은 이제 전기나 가스난로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장작난로나 연탄난로가 집안의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언제나 주위를 환하고 따뜻하게 해주는 그런 그리운 기억의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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