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화단이 온통 붉은 물감과 분홍물감을 뿌려 놓은 듯 선연하다 못해 불이 난 것 같아 흠칫 놀라 쳐다보니 영산홍무리들이다. 절기상으로 입하에 접어들었다. 때때로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부는 날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천지간 산과 들의 초목들은 초록으로 점점 무성해져만 간다. 한층 바람과 햇살은 상냥해져서 저절로 몸과 마음이 가벼워 진다.

그 숲속으로 뱀들이 기어 나오고, 무논에선 제짝을 애타게 찾는 개구리들의 울음소리가 요란하다. 저 소리를 들으며 자운영 꽃들이 눈부시게 피어나는 시기이기도 하다.

많은 형제 속에서 이도저도 아닌 여섯 번째로 태어난 나는 이즈음이 생일이다.

예전에는 이때가 가장 기근으로 힘든 춘궁기이었다 한다.

어린 날 시골에서 보리를 타작하기 전까지 먹을 것이 턱없이 부족했을 살림살이 속에서도 어머니는 생일날에는 정성껏 끓인 미역국과 고봉으로 푼 쌀밥을 꼭 생일상에 올려 주셨다.

그 시절에는 쌀이 많이 부족한 시기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생일이 된 아이들의 밥만큼은 꼭 흰 쌀밥으로 차려 줬으니 지금처럼  쌀이 귀하게 대접받지 못하는 시기의 아이들은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기도 하다.

다른 형제들은 보리밥인데 반해 혼자만 흰쌀밥을 대하고 앉은 어린 시절 생일 풍경이 아직도 내 기억 속에는 오롯하게 남아 있다.

아껴서 천천히 밥숟가락을 입에 넣는 어린 딸의 입을 보며 ‘그러다 밥이 앞으로 무너진다’며 농을 하시던 아버지가 생각난다. 아버지는 흰 쌀밥 한 그릇에도 행복해 하는 딸의 모습을 보며 어떤 감정이었을까?

생일이 되면 어린 날 내게 농담을 하시던 아버지가 때때로 생각이 난다.

오랜 병고 속 변변한 돈벌이도 없었던 아버지는 흰 쌀밥 한 그릇에도 행복해 하는 자식을 보며 자신의 무능을 한탄 하셨을 지도 모른다.

아이를 많이 낳지 않는 요즈음에는 아이들의 생일이 그저 식구들이 축하해 주는 자리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유명 프랜차이즈 뷔페 음식점에서 어린아이들이 생일잔치를 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아이들 수를 세어보니 대략 계산해도 수십만원이 족히 나올 것 같다.

어느 부모에게나 자식은 귀하다. 그러니 특별한 날에 자식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 부모의 당연한 기쁨이기도 하지만, 내 눈에 비친 그 풍경들이 과히 탐탁해 보이지 않는 것은 도를 넘는 지나침 때문이다.

어떻게 태어난 인생인데 이 세상으로 환하게 꽃잎으로 온 날이 기쁘지 않을까마는 그 나이들에게 맞는 축하의 자리들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손수 준비한 부모님의 사랑과 정성의 음식, 식구들과 친구들의 축하의 자리야 말로 진심어린 생일일 것이다.

두 아이가 이런 저런 일들로 해외로 군대로 간 올해의 내 생일 아침의 풍경은 참 스산하다.

스스로 끓인 미역국을 대하고 앉은 내 모습이 머쓱하기까지 하다. 다른 형제들보다 훨씬 큰 아기였다는 나를 낳기 위해 내 젊은 어머니는 얼마나 죽을힘을 다하셨을까! 그 고통이 고스란히 생생하게 내게도 전해져 온다.

몇 년째 노환으로 병석에 계신 늙으신 어머니에게 내 발걸음은 자연스레 향한다.

이제 어머니는 스스로 하는 일들이 그리 많지 않다. 앞으로 한 걸음 떼는 것조차도 너무 힘든 어린 아기처럼 되어 버렸다.

형제들과 토닥거리다 마음 다친 어린 딸에게 따듯한 밥상을 차려 어서 먹으라고 채근한 젊은 어머니의 모습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

딸의 생일날도 다 잊어버린 머리 하얀 어린아이가 되어 버린 어머니만 앞에 계실 뿐이다.

어떻게 늙을 것인가! 생일날 난 괜히 숙연하고 심각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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