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진천고등학교 교감으로 부임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쁜 마음에 학교를 방문했다. 교문을 들어서니 마침 쉬는 시간인지 여러 학생들이 양지에 모여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말은 봄이라고 하지만 아직 바람은 차니 학생들은 잠시라도 따뜻한 곳이 그리웠나 보다.

내가 그들을 지나 현관으로 들어가려고 하니 웅성거리던 학생들은 일제히 나를 보며 “안녕하십니까?”하며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였다. 생각지도 않은 학생들 인사에 얼떨결에 “그래, 고맙다. 쉬는 시간인가 보구나?”하자 “예”하고 대답을 하고는 다시 이야기꽃을 피운다.

학생들에게 뜻밖의 인사를 받으니 어느 사이 내 가슴은 따뜻한 온기로 가득 찼다. “어허, 봄은 남쪽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로부터 오고 있었구나. 요새 젊은이들을 ‘싸가지 없는 세대’라고 하더니 이제 보니 ‘싸가지가 있는 세대’네. 허허”

일주일에 한 번씩 무거운 가방을 들고 강의실이 있는 언덕을 올라간다. 내가 대학을 다니던 1970년대만 해도 이곳은 원시림에 가까운 숲이 있었던 곳이다. 봄이면 이름 모를 꽃으로, 가을이면 형형색색의 단풍으로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던 숲이었는데, 이제는 길옆에 서 있는 오래된 몇몇의 소나무만 옛 기억을 더듬어 나를 아는 체한다.

강의실이 가까워지자 강의실을 빠져나오는 학생과 강의실을 찾아가는 학생들로 복도는 만원이다. 강의 준비를 마치고 교탁 앞에 서니 100여개가 넘는 눈동자와 마주친다. 그 눈동자 속에서 지식에 대한 목마름과 학문에 대한 열정을 엿볼 수 있다.

잠시의 침묵이 흐른 후 나는 그 동안 생각했던 일들을 학생들에게 조용히 말했다. “여러분! 수업하기 전에 사제지간에 인사하는 ‘예’를 갖췄으면 합니다. 최고의 지성인이 모인 대학에서 ‘인사의 예’가 없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컬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제안을 하나 하겠습니다. 중고등학교처럼 회장이 일어나 ‘차렷, 경례’하는 것이 겸연쩍다면 수업 전에 제가 먼저 여러분께 ‘잘 가르치겠습니다‘라고 인사를 하겠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잘 배우겠습니다‘로 답례해 주셨으면 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여러분의 젊음이라는 시간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최선을 다하여 여러분을 가르치겠습니다. 반대로 여러분도 저의 시간을 소중히 생각하셔서 제가 가르치는 내용을 잘 배우겠다는 약속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좋은 강의는 선생님과 학생이 서로 ‘신뢰’하고 ‘학문에 대한 공감대’을 형성할 때 이뤄진다고 봅니다. 어떻습니까? 저의 생각에 동감한다면, 지금 당장 시작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잘 가르치겠습니다”하고 내가 정중이 인사를 하자 학생들은 일제히 “교수님! 잘 배우겠습니다”라고 힘차게 답례해줬다. 효(孝)가 백행의 근본(百行之根本)이라고 하지만 나는 인사도 ‘백행의 근본’이라고 생각한다. 어찌 ‘인사’ 없는 사제지간이 있을 수 있으며, 학문이 있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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