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바이처(Albert Schweitzer)의 저서 ‘물과 원시림 사이에서(More From the Primeval Forest)’에 나오는 내용이다.

산 중에서 맹수에게 쫓기는 토인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본 토인은 그가 어느 부족에 속했는지를 살펴본다.

그리고 자기 부족임이 확인되면 목숨을 아끼지 않고 구출하기 위해 희생을 감수하지만 만약에 다른 부족으로 인식이 되면 무관심하게 그냥 지나쳐버린다.

너와 나의 구별이 부족들에게 확연히 나타난다.

타인에 대한 배려가 없었던 것이 아프리카 토인들의 윤리의식이었다고 슈바이처는 말하고 있다. 생사의 기로에서 쫓기는 인간의 고귀한 생명을 구하는 데까지 부족의 구별부터 한다는 것만으로도 생명존중 사상이 결여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간애의 애끓는 가슴으로 비극 앞을 지나쳐 버린 무감각한 모습이 나에게는 없었는가를 스스로 물어보아야 한다.

타인의 아픔을 보지 않고 자신에게만 몰두하고 산다면 얼마나 삭막한 사회가 될까?

레오나르도 다빈치 (Leonardod a Vinci)는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직전 다른 화가와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두 사람 모두가 용서를 구하기보다 분노하며 헤어졌다. 다빈치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자리에 앉았지만 여전히 화가 나서 복수를 계획하였다.

완전한 계책을 꾸몄다. 그는 그리스도를 팔았던 배신자 가룟 유다의 얼굴을 그 화가의 얼굴로 그렸다.

분노에 사로잡힌 다빈치는 미친 사람처럼 신속하게 그림을 그렸다. 그의 뛰어난 기억력은 원수의 얼굴의 세세한 부분까지 생각해냈고 그것을 유다의 얼굴로 그렸다.

잠시 후 다빈치가 예수의 얼굴을 그리려고 하는 데 그리스도의 형상에 대한 영감이 아무리 애를 써도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결국 좌절감에 사로잡혀 붓을 던졌다. 곧이어 그리스도의 형상을 그리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 다른 화가의 얼굴을 유다의 얼굴로 그린 자신의 복수심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갈등을 하던 다빈치가 진심으로 회개를 한 후 미워하던 친구의 얼굴을 화폭에서 지우고 나자 다시 영감이 떠올라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불후의 명작 최후의 만찬을 완성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용서하는 마음을 품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형상을 마음에, 삶을 통해 그릴 수 없다.

기독교는 지금 고난주간을 지나고 있다. 고난주간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까지 고난을 받으시던 한 주간을 말한다. 기독교 신자들은 이 기간에 십자가를 생각하며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다.

개인적으로는 금식과 절제를 하며 교회적으로는 고난에 동참하는 행사들을 한다.

십자가의 고난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화해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화해이며 원수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과의 화해이다.

이러한 화해는 용서를 통해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죄인 된 우리 인간을 용서한 사건이 십자가라면 그 십자가를 바라보는 우리 모두는 용서를 통해 사랑을 확증해 가야하는 것이다.

미움과 원망과 질시가 가득한 세상을 바라보시던 예수는 십자가 위에서 용서를 빌었다. 지금 나는 누구를 용서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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