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겨우내 움츠리고 있던 만물들이 겨울의 그 어두운 시간들을 뚫고 세상의 빛 속으로 환히 나오는 생동의 계절이다.

봄의 어원은 ‘눈으로 보다’ 에서 연유해 이름 부쳐졌다는 설이 있다. 긴 겨울을 지나고 온 봄에는 그만큼 눈에 비치는 것이 화려해지고 즐거워진다는 것이니 여기저기서 사물들이 용수철처럼 통통 튀어 나올 법도 하다.

영어의 3월이 ‘spring’으로 왜 표기 되었는지 그 이름이 참으로 적절하다는 생각이 든다.

천지간 모든 어린것들이 생의 발랄을 맘껏 발휘하며 땅속에서 숲속에서 나뭇가지 끝에서 다투어 튀어 나오기에 그렇다.

부모의 품에 있던 어린아이들이 배움이라는 세상으로 접어드는 시기도 겨울을 접고 다시 한해를 시작하는 봄의 시작점부터다.

TV화면 속으로 나의 눈을 한순간 빼앗긴 것은 중국의 오지 마을 한 소녀 때문이었다.

그 아이의 학교 가는 길은 험난하기가 그지없다. 첩첩산골 가난한 마을에 학교라고는 없기에 왕복 세시간이나 산길을 걸어 학교와 집을 오가지만, 아이의 얼굴 어디에서도 싫거나 힘들다는 기색은 없다. 딱히 학교라고 하기엔 너무도 초라하고 허름한 목조건물 속에서 남자 선생 혼자 전교생을 담당한 수업에는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열 댓 명의 눈망울들만 있을 뿐이다.

교실 안 난방을 바란다는 것이 차라리 사치로 여겨질 정도로 추위 따윈 그들의 향학열을 꺾을 수 없다. 공부만이 살길이라는 그들 부모의 교육열 덕분이다.

가난한 저녁 밥상을 대하고 온가족이 모인 부엌에서도 오직 그들 부모의 대화와 궁금증은 딸의 공부이야기 뿐이다.

그만큼 공부라는 것이 세상으로 향해 우뚝 나설 수 있는 대안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그 총명한 딸아이는 부모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때마다 상장들을 타오고 전교 1등을 늘 놓치지 않는다.

비싼 전력비 때문에 전등을 켜지도 못하고 있으면서도 밤늦게 공부 하는 딸아이에게 전등은 늘 인심 좋게 환하다.

식구들이 모두 잠든 곁에서 홀로 깊은 밤까지 아이는 공부를 한다. 그 아이의 장래 희망은 대학을 마치고 선생님이 돼 고향으로 돌아와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다.

부모는 그녀의 꿈을 위해 기꺼이 온몸으로 희생할 준비가 돼 있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대학 뒷바라지를 끝까지 하겠단다. 그 희망의 따뜻한 모습을 보며 내 기억은 곤두박질치며 유년으로 내려간다. 불과 몇 십 년 전 우리들의 광경과 별반 다르지 않다. 너나 할 것 없이 궁핍했던 내 어린 시절, 여자아이들이 상급학교에 진학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대부분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다들 도시의 공장생활을 해야 했다.

그 어린 나이부터 고단한  노동의 현장에서 돈을 벌어 부모들의 가난한 살림살이에 보태고 유일하게 상급학교에 진학한 남동생이나 오라비들의 학비를 부치기도 했다.

그녀들이 집안을 일으킬 수 있는 돈벌이의 유일한 희망이라 생각했기에 가족들은 그들에게 삶의 무게를 지운 것이다.

돈벌이가 신통찮았던 나의 부모들도 여러 형제들을 다 학교에 진학시키는 것은 무리였을 것이다. 그 곤궁한 살림살이 속에서도 개중 똘똘한 녀석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공부를 하게끔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니 그 고통이 어떠했을까! 생각만 해도 가슴 한쪽이 저릿하다. 

공부만이 출세 지향적이라는 생각이 지배했던 시대는 많이 변했다. 하지만 나라간 국경이 없어지는 글로벌 시대에는 인적 자원만큼 큰 국가의 자원도 없다.

더군다나 변변한 천연자원도 없는 우리나라가 현재 세계 속 경제대국으로 우뚝 서게 된 것도 그 극성스러울 정도로 자식들을 교육시킨 우리네 부모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다시 3월이다. 눈을 반짝이며 이 나라의 희망 새내기들이 가방을 메고 학교로 가는 활기찬 새로운 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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