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상·추상세계 넘나들며 끝없는 창작열 불태우다
구상·추상세계 넘나들며 끝없는 창작열 불태우다
  • 충청매일
  • 승인 2013.03.04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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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견작가들 모여 백양회 창립해
한국 동양화단 새로운 방향 모색
韓 최초 화문집 출간기념회 열고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작품 출품

반추상 작품 시기-장년기(41~50세) : 1954~1963년

운보는 50년대에 들어서면서 복덕방, 구멍가게, 엿장수, 노점 등 입체적 작품들을 실험작으로 제작했다. 이어 한국 전통의 가면극을 작품화한 탈춤 시리즈 등 반추상 작품들을 발표하면서 왕성한 실험정신을 보였다. 군밤장수, 탈춤 시리즈 등 반추상 작품들은 강하고 굵은 선을 보이면서 같은 해에 곧바로 ‘문자도’라는 완전 추상의 작품까지 제작하게 된다.

40대가 된 운보는 1955년 봄 당시 홍익대학교 미술학부를 창설한 윤효중씨의 초빙으로 홍익대학 교수로 취임했다가 49세에는 수도여자사범대학(現세종대학교) 미술교육과 회화과장으로 재직하게 된다.

운보의 홍익대 제자들은 또 다시 후학을 양성하기도 했는데 중앙대의 부총장을 역임한 오태학을 비롯해 군산대 이용휘, 경원대 최재종, 단국대 이영수 등이 예술대학장을 역임했고 곽석손은 한국미협 이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필자는 이외에도 목원대 조평휘, 정명희, 차영규, 이석구, 하선용, 문은희, 이영자, 이숙자 등 수많은 제자들을 만났는데 이들은 졸업 이후에도 운보와 지속적인 끈을 이어가던 분들이다.

몇개의 기억을 돌이켜 보면 오태학 선생은 설과 추석에 운보가 자리에 있거나 없거나 부부가 함께 내려와서 조용히 선물을 놓고 갔는데 2012년에 만나 뵈었을 때 건강이 좋지 않아서 마음이 아팠다.

조평휘 선생은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운보 앞에 오면 학생처럼 꼭 무릎을 꿇고 앉아있다 가고는 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운보가 말년에 병석에 눕게 되자 수도여자사범대학의 제자인 심경자(前세종대 예체능대학장)선생은 평소보다 더 빈번하게 운보의집을 부부 동반으로 찾아왔고 운보의 손을 잡고 눈물을 보이며 안타까워했다. 올 때 마다 좋은 음식과 약 등을 가져 왔는데 선생님을 위해 써 달라며 필자에게 돈을 건네주기도 했다. 나에게는 모두 소중하고 그리운 추억들이다. 또 정명희씨는 운보문화재단의 초대이사로 운보를 기리는 일에 앞장서고자 했으나 재단의 파행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물러났고, 목원대 미술대학장을 역임했던 조평휘씨는 운보 사후에 초대 운보미술관장을 맡기도 했다. 현재 3대 운보미술관장은 홍병학씨이며 필자는 분에 넘치게도 2대 운보미술관장을 지낸 바 있다.

1956년 5회 국전에 운보는 추천작가로, 우향은 대통령상을 받은 ‘노점’으로 나란히 출품했다. 우향은 같은해 미협전에서도 ‘이른아침’으로 대통령상을 받았는데 한 작가가 1년에 대통령상을 두 번 받은 것은 미술사적인 측면에서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남았다.

미학자인 ‘진 맥드다니엘’은 “김기창 화백 부부의 전시는 새로운 각도에서 참으로 깊은 감명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중략) 미국의 현대 작가 가운데 많은 사람이 김 화백 부부의 작품과 같은 표현 방법과 색깔 쓰는 법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은 매우 대단한 일이다”고 평했고, 뉴욕에서 미국 최초 한국작가초대전을 개최하였을때 화랑 주인은 운보가 출품한 1천호짜리 군마도를 1957년 당시 가격으로 2천 달러에 구매하기도 했다.

요즘 관점으로 살펴보아도 이 시기 작품들처럼 새롭고 참신한 감각의 작품들은 쉽게 만나보기가 어렵다는 것에 놀라울 따름이다.

▶‘백양회(白陽會)’ 창립

각자 화법과 표현경향이 다른 중견작가들이 모여 한국 동양화단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자 1957년에 운보를 초대회장으로 백양회가 창립됐다.

이들은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 7년 뒤인 1964년부터 화단의 후배들을 위해 공모전을 열기 시작했다. 이 공모전은 국전과 쌍벽을 이루는 민전으로 발전하며 그 의의가 커졌다.

사람들은 백양회 창립전에 출품한 운보의 ‘성당과 수녀와 비둘기’가 신의 계시를 받아 그린 작품일거라는 말들을 한다.

그 이유는 어느 날 운보가 영감을 받아 그림 한 점을 그렸는데 이 때 운보 부인은 막내를 임신 중이었으며 이 딸이 현재 수녀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때 그린 ‘성당과 수녀와 비둘기’는 현재 로마교황청에 소장되어 있다.

운보는 삽화가 동인회원으로도 활동했다. 결혼직후 자유신문사 기자로 활동한 경력 때문인지 운보는 많은 신문에 삽화를 그렸으며 그의 삽화는 간결한 터치임에도 각 표정들이 리얼하게 살아 있음을 볼 수 있다. 1954년부터 1979년까지 한국·경향·서울·중앙일보 등에 소설 민주어족(정비석 作), 군웅(김팔봉 作), 낭만열차(정비석 作), 여인천하(박종화 作), 바다의왕자(정한숙 作), 취장세우(박용구 作), 강남춘곡(우현민 作), 임꺽정(최인욱 作), 삼국지(박종화 作) 여왕(최인욱 作), 삼국기(김동리 作), 장길산(황석영 作) 등 삽화를 그렸다.

또 동양화가 최초로 체신부 우표도안심의위원에 피선된 운보는 한국 우표의 미술적 감각을 심는데 공헌했는데 운보에게 ‘유일’, ‘최초’ 등의 수식어가 유독 많은 것은 그만큼 연구와 도전의 자세가 있었고, 창의성과 창작열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1962년 우향과 만난 20주년을 기념하는 부부전을 개최할 때도 한국 최초의 화문집인 화방여적(畵房餘滴)의 출간기념회를 겸 했다. 제2회 5월문예상(미술본상)을 수상한 63년에도 한국작가로는 최초로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작품을 출품했다.

이 중 화방여적은 운보가 10여년간 발표했던 글들과 이에 맞는 그림을 편집하고, 노트에서 고른 스케치화 등으로 구성한 우리나라 최초의 화문집이다. 월탄 박종화씨는 화방여적의 서문에서 “그는 미의 세계에서 천의무봉이요, 문의 세계에서 종횡무진이다. 운보의 화복과 문복을 아울러 예찬하지 않을 수 없다. 회화는 외국까지 이름이 높으니 말할 나위도 없다”고 극찬했다.

운보는 ‘아트리에의 독백’이라는 자작 글에서 “누구인지 화가의 아트리에는 신성불가침의 성역과도 같다고 말한 걸 기억한다. 그러나 지금 나에게는 불행히도 이런 성역을 지니지 못하고 말았다. 오전과 오후에 두 번씩 음과 양으로 그야말로 조석변하는 불완전한 채광 속에서 내객의 침입으로 하여 객실이 돼 버리고 아침 저녁 식사 때가 되면 가족들 식당이 된다. 그것뿐 아니라 잠자리를 펴게 되면 침실로 변모되고 마는 것”이라고 기술했다. 성북동 화실은 그동안 온돌방을 화실겸 침실겸 응접실로 사용하면서 한사람이 작업할 때는 한사람이 쉬어야 하는 상황으로 아주 불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북동의 화실을 개축하려면 400만~500만원의 공사비가 필요했고 이를 고심하던 운보는 1962년 3월 아는 은행원의 도움으로 100만원을 융자받아 무작정 설계도 없이 집 뒤꼍에 화실을 짓기 시작했다. 터를 닦고 기둥을 세우니 자금이 바닥나서 공사를 중단했지만 이후 연말에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달력 주문이 들어온 덕분에 30평 화실을 완성할 수 있었다.

공간이 넓어지자 대작을 마음껏 그릴 수 있게 된 운보는 작업에 더욱 활기를 띠며 운보의 3기인 추상작업으로 돌입하게 되었고, 이로부터 1년 뒤인 1963년 12월 중앙공보관에서 부부전을 개최하며 150호 이상의 대작으로 운보는 ‘시상’, 우향은 ‘잊혀진 역사 속에서’를 주제로 완전추상계열의 작품 23점을 전시했다. 한국일보는 “공식에서 벗어난 새것을 모색한 김기창 부부전은 63년 화단에 마지막으로 플러스 한 수확이었다. 이번 부부전은 또 다시 많은 화제와 새로운 숙제를 동양화단에 던졌다”고 했다.

미술평론가 이경성은 조선일보에 “그들은 구상의 시각에서 미의식을 해체시키면서 추상의 세계로 이행해 왔다. 이같은 조형실험적인 추상에의 귀의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개인차는 그의 도달점을 달리하고 있다. 김기창의 조형방법이 시적이라면 박래현의 그것은 산문적이다. 김기창은 전통을 지양시키면서 보다 높은 차원에서 조형과의 대화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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