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티푸스로 언어장애 앓아
17세에 화가의 길 들어서
2만점 넘는 예술작품 남겨
청음회관·운보원 등 설립

운보 김기창은 1913년 서울 운니동에서 태어나 장티푸스로 인한 고열로 청각을 상실한 후 언어 장애 증세가 있었다. 하지만 아들의 재능을 알아본 어머니의 소개로 이당(以堂) 김은호 화백에게 동양화를 배워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후 충북 청원군 내수 어머니의 고향(운보의 집)에 돌아와 지내며 2001년 1월 작고하기까지 수많은 작품활동을 했다. 운보는 친일작가라는 불명예를 갖고 있지만 장애를 극복하고 동양의 정서를 예술로 승화해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예술작품을 남긴 입지전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충청매일은 운보 탄신 100주년을 맞아 특별기획 ‘운보의 삶과 예술 재조명’을 통해 운보의 삶과 예술세계를 새롭게 반추해 보고자 한다. 집필을 맡은 김형태씨(국제장애인문화교류충북협회 회장)는 운보의 집에 머물며 운보가 작고 할 때까지 곁에서 비서역할을 했던 장본인으로 누구보다 운보의 삶과 예술세계를 잘 이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운보 김기창 화백. 그는 말년에 어머님의 고향인 충북 청원에 운보의 집을 만들고, 20년이 넘는 세월을 그 곳에서 작품 활동을 하다가 2001년 타계했다.

운보는 한국 화단의 대표적인 인물로 후학 양성과 함께 여러 가지 다른 화풍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왕성한 창작활동을 한 작가로 2만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또한 장애인들의 대부격으로 장애인들에게 큰 꿈과 희망을 갖게 해 주었던 인물이다.

19세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 어린 장애인은 소년가장으로 동생들을 부양해야 하는 질곡의 환경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부단한 노력으로 점철된 삶을 살았다.

이것은 자신과 같은 장애인들이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지원하는 청음회관(사회복지법인)과 한국농아복지회(現한국농아인협회), 운보원(장애인 직업학교)을 설립하는 계기가 됐으며 또한 자신의 심정과 열정을 화폭에 담아내며 한국 화단의 거목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듣지 못했기에 보이는 것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소통해야 했던 소년 운보는 이후 자신의 작품을 “가슴에 응어리진 피눈물의 표현” 이라고 했다.

올해는 운보 김기창 화백의 탄생 100주년이다.

너무도 조용한 가운데 지난 1월 23일 운보가 설립한 청음회관의 주관으로 故 운보 김기창 선생님의 12주기 추모식이 있었다.

운보원의 직원들과 후소회 회원, 운사회 회원, 제자들이 참석해 고인을 추모했다. 그러나 선생님의 묘소에서 내려다본 운보의 집은 한명의 관람객도 없어(현재 휴관中) 황량하고 을씨년스러운 기운만이 감돌고 있었다.

운보 생전 운보의 집은 시민들의 명소로 가족나들이,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 학생들의 소풍 등으로 북적거리는 생기가 있었으나 그의 사후에 이렇다 할 방향 없이 표류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동양의 피카소라 불리며 한국 미술사에 한 획을 긋고 가셨던 고인을 기리며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 분의 미술세계와 살아온 이야기를 돌아본다.

1979년에 운보선생은 자신의 작품 시기를 구상, 반추상, 추상, 묵화의 강한 선 연구, 바보산수 시기로 구분했다고(참조:이흥우의 ‘운보 김기창’ 경미문화사, 1980) 하는데, 나는 여기에 화가로 입문한 17세 이전의 어린 시절과 말년의 이야기를 추가해 소개하고자 한다.

▶어린시절 (1913~1929년, 16세)

운보는 1913년 2월 18일 서울 종로구 운니동 18번지에서 태어났다. 나는 운보선생님 생전에 함께 그 곳에 들렀었다. 그때는 ‘운정’이라는 식당으로 변해 있었으나 예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여기는 우향과 처음 만난 날 필담 하던 곳, 저기는 할머니가 세수대를 놓고…”하는 추억을 떠올리며 옛날을 그리워하던 운보 선생님을 잊을 수 없다. 그러나 이후 찾아 간 그 곳은 호텔로 변해 있었다.

토지관리국에 근무하며 하숙하던 김승환과 하숙집 딸 한윤명 사이에서 태어난 김기창은 생후 한 달도 안 돼서 갑자기 20시간 동안 숨이 멎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경험을 한다.

5세때 와룡동에 있는 서당에 입학해 천자문과 통감을 익혔으며, 6세에는 인사동에 새로 생긴 중앙유치원에 입학해 오전엔 유치원에서, 오후엔 서당에서 학문을 익혔다.

운보는 유치원에서 연극이 있을 때 주역을 도맡았는데, 서당의 졸면서 공부하는 학생, 합창단의 지휘자 등의 역할을 했으며 이때의 기억들은 운보의 소리에 대한 모든 것으로, 운보는 노년에 그 ‘소리’의 느낌조차 기억나지 않는다고 자주 회상하며 아쉬워했다. 

7세에 보통학교에 입학한 그는 입학 다음날 장충단 공원으로 운동회를 겸한 소풍을 갔다가 장티푸스에 걸렸고 고열로 인해 그만 청각을 잃고 말았다.

수업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입학과 동시에 학교를 그만 두어야 했던 것이다.

듣지 못해 학교에 가지 않고 집에서 소일할 때 미술대학을 중퇴한 외삼촌(청주생·유족들은 현재 청주 금천동에 거주)이 마당에 이젤을 세워 놓고 그림을 그리고 있으면 운보는 이것이 신기해 유심히 바라보곤 했다.

학교를 떠났던 운보는 12세에 1학년 2학기로 복학했으나 한글도 일본어도 익히기가 어려워서 무료한 수업시간엔 책에 낙서를 하기 시작했다.

13세인 2학년이 되어도 한글을 못 깨우치자 어머니는 퇴근 후 한문과 연결시켜 한글을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던 연유로 깨우치는 속도가 빨랐다. 

운보는 어머니가 근무하던 세브란스 병원에 놀러갔다가 ‘어린이’ 잡지를 보고 흥미를 느꼈으며 이후 ‘새벗’, ‘소년계’ 등 잡지까지 매월 사서 읽게 됐고, 15세때는 응모한 동시가 당선돼 ‘어린이’ 잡지 7월호에 실리기도 했다.

호기심이 많을 나이에 듣지 못하게 되었던 운보는 글을 깨우치면서 독서광이 되었으며 ‘철가면’, ‘삼총사’, ‘괴도루팡’, ‘셜록홈즈’ 등 추리소설도 섭렵하며 잡지, 소설 등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기 시작한다.

전국대회에 육상선수로도 출전했던 운보는 성격이 밝고 활달했으며 5학년때는 이웃집에 사는 제일고보(現경기고등학교) 2학년인 한종원과 친하게 지내며 목탄화를 배우게 된다.

늦은 17세에 5학년으로 졸업한 운보에게 아버지는 목수가 되기를 권유했으나 어머니는 운보의 재능을 알아보고 당대의 최고 화가였던 이당 김은호(어진화가)를 찾아가 부탁해 사사를 받게 했고 이때부터 운보는 본격적인 화가의 길을 걷게 됐다.                 

/ 김형태 국제장애인문화교류 충북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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